제101회 총회 주제 해설 ②종교개혁의 기원과 발전

제101회 총회 주제 해설 ②종교개혁의 기원과 발전

[ 특집 ] 종교개혁, 사회와 함께 진행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6년 10월 18일(화) 09:46

종교개혁은 유럽사회를 넘어 세계의 흐름을 바꾼 역사적 대변혁이었다. 이 사건은 교회를 넘어서 사회까지 변화시켰다는 점에서, 종교인 나아가서 모든 이들의 관심거리였다. 이 사건이 종교적 사건인 동시에 사회적 사건이었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이 사건의 기원과 발전을 종교라는 미시적 맥락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망라한 거시적 맥락 속에서 살펴볼 것을 요구한다.
유럽의 변화가 없었다면 종교개혁이 없었을 것이고, 역으로 종교개혁이 없었다면 근대적인 유럽이 없었을 것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다면 종교개혁은 어떤 맥락에서 발생했고, 또한 어떤 영향을 주고받았을까?


교회개혁을 위한 움직임은 교회역사에 있어서 항상 있었고, 특히 종교개혁 직전에는 다양한 교회개혁 운동이 이뤄졌다. 다만 오늘날 우리가 종교개혁이라고 부르는 운동이 이런 교회개혁 움직임 중 가장 대표적이고 결정적인 것이기에, 특별한 명칭을 사용해 부르고 있다. 중요한 사실은 종교개혁이 일어났던 시기는 일반역사에 있어서도 중세사회가 근대사회로 이행하는 격변기였다는 점이다. 

중세유럽은 비록 교권과 왕권, 혹은 교회와 국가 간에 갈등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사회 위에 군림하는 두 개의 지도자로서 공생관계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의 대두로 인하여 두 가지 변화가 나타났는데, 하나는 전체 기독교세계에 대한 개별국가의 우선성이요, 다른 하나는 그에 따른 교황 영향력의 위축이었다. 만일 이런 변화가 없었다면, 루터도 한 세기 전에 개혁을 부르짖다 순교한 얀 후스(Jan Hus)와 동일한 운명을 맞이했을 것이다. 민족주의가 종교개혁의 원인(遠因)이 되었다면, 종교개혁은 민족주의를 강화하였다. 
그 결과, 중세유럽에 기독교세계와 가톨릭교회가 짝을 이뤘다면, 종교개혁시기에 민족국가와 민족교회가 짝을 이루게 되었다. 중세유럽이 근대유럽으로 이행하는 시기에 또한 민주주의가 대두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아직 정치적인 본격적인 민주정이 도래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자본축적을 통해 새로운 신분인 시민 즉 부르주와(Bourgeois) 계층이 등장했고, 집단주의에서 벗어나는 개인주의가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종교개혁 당시, 도시를 중심으로 한 신흥계층이 자기주도적인 신앙, 자기주도적인 종교인 개신교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더구나, 적어도 막스 베버(Max Weber)의 이론에 의하면, 종교개혁은 신흥계층에게 걸 맞는 신앙유형을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삶의 양식에 걸 맞는 윤리를 제공하였다. 신흥계층은 종교개혁의 주축세력이 되었고, 그 결과 중산층의 신앙이라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종교개혁의 신앙은 이와 달리 명시적 신앙(explicit faith)의 형태를 지녔다. 즉 각 개인이 스스로 신앙에 대해 질문하고, 이해하고, 믿고, 실천하는 신앙이다. 


종교개혁의 신앙은 교회의 신앙이라고 하는 집단주의적 신앙에 안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구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직접 확인하려는 개인적 신앙을 추구하였다. 이제 종교개혁의 신앙은 각 개인의 신앙 자체는 물론 그의 신앙스타일과 신앙인으로서의 생활스타일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중세까지의 학문은 놀라운 업적을 이룬 것도 사실이지만, 학문적 엄밀성은 부족했다. 물론 계몽주의 이후에 학문적 엄밀성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되었지만, 그런 태도는 이미 르네상스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신학자들이 신학연구를 통하여 바른 신앙을 발굴했다면, 신자들은 성경연구와 설교를 통하여 그런 바른 신앙을 확인하고 선택했다. 따라서 학문적 태도는 그 양상은 차이가 있지만, 신학자와 신자 모두에게 요청되었다. 그래서 칼뱅은 교회의 직제를 목사, 교사, 장로, 집사라는 4중직을 내세우면서, 목사와 교사는 중복될 수 있다고 했는데, 바로 교사로서 혹은 신학자로서의 목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이다. 

종교개혁이 정신적인 운동이었지만, 그것을 확산한 것은 바로 인쇄술이었다. 특히 종교개혁이 지식적 종교라는 측면이 강했기에, 인쇄라는 매체는 종교개혁 확산에 있어서 매우 적합한 매체였다. 종교개혁 문서, 특히 루터의 충격적이고도 획기적인 문서는 바로 이런 상황에 놓였던 당시 출판계로서는 가뭄 끝의 단비 격이었다. 즉 그의 문서는 출판계의 기대에 넘치게 보답했을 뿐 아니라, 당시 새로운 소식을 간절히 기다리던 대중들의 갈증을 단숨에 씻어주었다. 종교개혁은 신문명을 선도적으로 활용하면서, 큰 효과를 거뒀다. 요즘 말로 말한다면, 얼리 어덥터(early adopter) 즉 새로운 기술을 가장 먼저 이용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종교개혁은 개혁적인 신앙운동이었을 뿐 아니라 혁신적인 신앙운동이었다.
종교개혁 문서는 새로운 문화를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문화를 창출하기도 했다. 종교개혁은 조각, 성화 등 기존의 기독교미술을 거부했지만, 동시에 그들에게 필요한 기독교미술을 확산시키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삽화였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신앙을 가져왔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개인적 신앙의 특성이 강했다. 이런 특성은 신앙과 양심의 자유를 중요시했다. 인간됨의 핵심은 자기 소신을 선택하는 자유요 권리라는 점을 밝힌 것이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은, 종교개혁 내에도 다수파와 소수파가 갈등을 빚었다는 것이다. 다수파는 가톨릭교회에 대해서는 종교자유를 주장하면서, 소수파에 대해서는 종교자유를 제한하는 모순을 보였다. 

종교개혁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대표적인 것은 위에서 언급했던 다수파와 소수파, 혹은 주류(magisterial) 종교개혁과 과격한(radical) 종교개혁이다. 전자는 신앙의 차원에서는 가톨릭교회와 차별화하려고 했으나, 체제의 차원에서는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정치권과 협력하는 가운데 기독교사회를 구현하려고 했다. 그러나 후자는 신앙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교회와 사회의 관계에 대해서는 소원한 자세를 취했다. 이런 차이는 종교개혁의 신봉자들이 모이는 교회에 대한 이해 곧 교회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종교개혁은 새로운 사회의 산물인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배태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무엇보다도, 동의어반복이 될 수 있지만, 개혁운동이었다. 즉 새로워져야 할 필요성을 주목했고, 새로워지는 과제는 실천해나갔다. 그러나 역사가 증명하듯이, 개혁세력도 변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종교개혁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만 한다(Ecclesia reformata est semper reformanda [The reformed church should always be reformed])"라는 모토를 주창하였다. 교회의 개혁은 교회의 개혁으로 끝나지 않고 사회의 개혁으로 이어진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이 현대사회에 던지는 질문이다.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