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공보 기획> 남선교회 제61대 회장 김장원 장로

<기독공보 기획> 남선교회 제61대 회장 김장원 장로

[ 교계 ]

신동하 기자 sdh@pckworld.com
2016년 08월 30일(화) 14:05
▲ 송죽교회 김장원 원로장로.

"지난 80년 간 나의 인생은 온통 하나님의 역사가 숨 쉬는 기적의 현장이었다. 지내고 보니 하나님은 요셉과 같이 나를 사랑하셨고 인도하셨음을 고백한다."

김장원 장로(서울서북노회 송죽교회 원로)가 지난해 나이 80인 산수(傘壽)를 맞아 인생을 회고하는 에세이집 '지혜있는 삶'을 발간하며 머리말에 남긴 고백이다. 김장원 장로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 제61대 회장을 지내며 남선교회 발전에 족적을 남긴 평신도 원로 지도자다.

지난 2002년 김장원 장로는 사재 1억원을 출연해 재단법인 남선교회장학회를 설립했다. 당시 남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이던 김 장로가 쾌척한 1억원과 추가적으로 납입한 4000만원 등 누적금액 1억4000만원을 시드머니로 130여 명의 고등학생과 신학생이 장학혜택을 받았다.

김 장로는 젊은 시절부터 학원사업에 뛰어들었다. 전국의 3대 종합학원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은석학원의 설립자다. 그 자신, 주경야독 고학한 기억을 떠올리며 신앙 후배들이 등록금 걱정 없이 학업에만 전념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장학회를 조직했다.

김 장로는 "나의 학창 시절은 가난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고학하며 훗날 장학사업을 꼭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며 "장학회 설립은 신앙 후배들에게 희망을 주면서 남선교회의 연합사역을 알리는 의미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 김장원 장로는 고학의 기억을 떠올리며 학원사업을 하면서 틈틈히 어려운 학생들을 도왔다. 남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 시절에는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김 장로는 1935년 전남 나주군 남평면 수원리 수청마을에서 태어났다. 김 장로는 모태신앙인이다.

조부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온 가족에게 복음을 전했다. 조부는 몸이 아파 광주의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전도받은 후 연평교회를 개척하는 등 충성된 전도인으로 살았다.

김 장로는 중학교 2학년 때 죽을 고비를 넘긴 간증이 있다. 고향 남평에서 광주로 30리 길을 기차로 통학하던 어느날 아침밥을 먹고 기차시간에 쫓겨 20분을 뛰어 가까스로 기차 문에 매달린 채 탑승했지만 이내 기절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밥 먹은 것이 체해 기절하며 바닥에 얼굴이 그대로 부딪혀 앞니 2개가 부러지고 얼굴은 엉망진창이 되었다. 김 장로는 이날 사건에 대해, "죽을 수도 있던 순간, 하나님의 은총으로 경미한 부상에 그친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 장로는 가정형편이 너무 어려워 서울에서 일을 하며 학교에 다닐 생각으로 17세에 홀로 야간열차를 타고 상경했다. 아버지가 쥐어준 약간의 돈으로 서울 숭인동에 몸 하나 뉘일만한 자취방을 얻은 후 을지로를 돌아다니며 취업부터 알아봤다.

"기술도 하나 없는 저같은 청소년을 누가 쓰려고 했겠습니까? 그래도 어렵사리 철물점에 취직해 온갖 잡일을 도맡아 했습니다."

▲ 김장원 장로의 집안은 조부의 영향으로 기독교신앙이 전파됐다. 김 장로도 슬하 자녀들에게 선조들의 올바른 신앙을 전승하고자 노력했다.

김 장로는 주경야독했다. 낮에 철물점 일을 하며 야간에는 마포고등학교에서 공부했다. 이후에는 동대문시장에서 포장지 배달 일을 하는 고된 나날이 이어졌지만 인내심을 가졌다.

김 장로는 "인생 밑바닥을 헤매면서도 '내 인생은 내가 개척한다. 남탓 할 것 없이 내가 열심히 하면 된다'는 신념을 가졌다"며 "힘들수록 어금니 꽉 깨물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하나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는 생각을 늘 가졌다"고 회고했다.

연세대 물리학과에 입학해서도 고학은 계속됐다. 그래도 미래를 생각하며 3시간 이상을 자지않고 공부에 매달렸다. 당시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져 김 장로는 새벽 4시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고 한다.

김 장로는 "내가 새벽기도를 40년 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며 "대학생 때 공부와 일을 병행하느라 새벽이면 항상 눈을 떴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님의 훈련이었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도 새벽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 감사하게도 새벽기도를 다닌다"고 말했다.

김 장로는 이 시기 성경을 묵상하며 '요셉의 꿈'에 주목했다. 고난 가운데 축복을 묵상하며 꿈을 키우고 꾸준히 걸어 앞으로 나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희망을 잃지 않고 정직하게 앞으로 나아가니 어느새 주님과 가까워졌다.

김 장로는 대학 재학 중 가정교사 일을 하던 경험을 바탕으로 졸업 후에는 여고의 수학교사로 재직하다 학원 강사로 전업했다. 부모님이 모두 서울로 올라온데다 8남매의 장남으로 동생들을 돌보면서 교사 월급으로는 생활이 빠듯해 학원 강사를 시작했다.

학원 강사를 하며 인기강사로 이름을 날렸다. 그러면서 서울 도렴동에 종합학원인 은석학원을 차렸다. 학원사업을 통해 그는 방황하는 대입 준비생들을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바르게 인도하려 노력했다.

학원사업을 하며 시골의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을 잊지 않았다. 가난이 공부를 막게 하는 것을 김 장로는 볼 수 없었다.

그는 은석학원을 전국의 3대 명문학원으로 키운 뒤 교육개혁의 원대한 꿈을 안고 초대 서울시 교육위원에 도전해 선출되면서 사업을 정리했다.

▲ 김장원 장로는 침술을 배워 부인 김지은 권사와 동남아시아의 열악한 지역을 돌며 의료선교를 오랜기간 펼쳐왔다.

그러면서 그는 평신도 연합사역을 통해 선교 열정을 쏟았다. 특별히 중국에서 침술을 2년 간 배우고 자격증을 취득해 의료환경이 열악한 아시아지역을 두루 돌며 봉사해왔다.

김 장로는 남선교회전국연합회 회장 시절, '남선교회 행동강령'을 만들어 사회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표본을 제시하고, 장학회 설립으로 기독인재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환경녹색선교단을 창립해 등산로의 오물을 주으며 하나님의 창조섭리를 알리는 데 일조했다.

김 장로는 하나님 곁으로 갈 때까지 선교에 매진하고자 평소 건강 관리가 철저하다. 정기적으로 등산을 가는게 가장 즐겁다고 한다.

김 장로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연을 보고, 만지고, 걷는 것만으로 마음에 평안이 온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복식호흡을 하니 폐활량도 좋아진다"고 강조했다.

김 장로는 인생 후반기에 하나님 일꾼으로 충성하고 나라사랑에 헌신하는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김장원 장로는 "지나온 삶에서 얻은 교훈은 순종이 복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겸손하게 살아가려 노력한다"며 "천국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오늘이 이 세상 마지막 날'이라는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가족관계는 부인 김지은 권사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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