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깊이가 배를 정한다

물의 깊이가 배를 정한다

[ 논단 ] 주간논단

김창인 목사
2015년 11월 03일(화) 11:34

김창인 목사
증경총회장ㆍ광성교회 원로

피상적인 시대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누구나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 겉은 화려한 삶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마트에 진열되어 있는 과자만 봐도 질에 비해 광고는 너무나 요란하고, 포장은 화려한데 내용물은 보잘것없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는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붕괴 사고 등 이 시대의 비극도 따지고 보면 속은 텅 비어 있으면서 겉은 너무나 화려하게 치장된 부끄러운 자화상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물을 보고 그 물에 뜰 수 있는 배가 어떤 크기인지 가늠하게 된다. 물의 깊이에 따라 띄울 수 있는 배가 따로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시냇물에는 종이배를 띄우고, 호수에는 오리배를 띄우지만, 깊고 넓은 바다에는 수 만 톤급 유조선과 항공모함도 띄울 수 있다. 물의 깊이와 넓이가 배의 크기를 결정하듯이 내가 깊이 있는 사람이 될 때 다른 사람을 대양처럼 품을 수 있는 것이다. 

깊이가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품고 있다는 것이요 큰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거친 물결과 험한 파도까지 다 겪은 뒤 여유를 잃지 않고 넉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표적인 영성신학자인 리처드 포스터는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사람은 지능이 높거나 혹은 재능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깊이가 있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지금 한국교회는 성공주의와 물신주의, 기복주의로 가득 차 있다. 목사들부터 예수님이 보여주신 겸손하고 청빈한 모습을 닮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교회를 외형적으로 키우는 것을 목회의 성공방정식으로 여기며 복음의 길에서 역행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다. 예수님이 그토록 바리새인들을 싫어했던 이유는, 그들의 속은 썩었는데 겉만 회칠한 무덤처럼 단장했기 때문(마 23:27)이었는데 한국교회가 꼭 빼닮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깊이를 잃어가고 있다는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꼭 498년 전에 일어난 종교개혁은 마르틴 루터가 당시 교황과 성직자들에 만연한 폐습을 지적한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다. 가톨릭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회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고, 신구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누구나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하였다. 당시 루터는 성서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강조하였던 기독교 역사상 전무후무한 신학적 '반항'(Protest)을 하게 되는데 후세는 이것을 '종교개혁'이라고 부르게 된다. 루터와 개혁자들이 시작한 종교개혁의 결과로 기독교 세계에 개신교라는 새로운 갈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당시에 루터는 자신이 훗날 이토록 대단한 신학적 반항아의 타이틀을 거머쥘 욕심보다는 사제로서 눈앞의 부조리를 차마 외면할 수 없다는 절박한 양심의 소리에 그저 순응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어떤 의도와 목적에서 가톨릭에 매스를 가했든 그날의 사건은 돌이킬 수 없는 혁명이 됐다. 그와 뜻을 같이 하는 개혁자들의 양심적 행동이 요원(燎原)의 불길같이 일어나 유럽 전역을 불태웠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 한국교회의 상황은 1517년 당시와는 많이 다르다. 당시 루터가 지적했던 교황청의 수탈행위를 일부 개교회의 헌금 강요와 동일선상에서 연결짓는 이들도 없지 않으나 당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교권을 한국교회에 비교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500년 전에 일어났던 종교개혁을 빗대어 기독교를 비판하며 한국교회의 미래를 걱정하고 있는 데는 수긍하고 반성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안에 이미 깊숙이 스며든 맘모니즘과 종교적 권위주의, 파벌주의는 500년 전보다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는 인류 문명의 흥망성쇠를 내부적인 원인에서 찾았다. 세계 문명 21개 중 19개의 쇠망이 전쟁과 같은 외부적인 파괴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의 부패, 절망에 따른 도덕적 해이와 타락으로 이어지며 무너지게 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잊는다면 교회도 무게중심을 잃고 기울게 될 것이다. 한국교회를 개혁하고 갱신해야 하겠다는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결단하기보다 오히려 "이대로 여기가 좋사오니"하며 눌러앉는 길을 택하면 489년 전, 그 이전으로 퇴보할 수도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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