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권을 위한 투쟁?

생존권을 위한 투쟁?

[ 목양칼럼 ] 목양칼럼

이상진 목사
2015년 10월 12일(월) 18:54

필자가 현재 시무하는 교회에 부임하여 교회성장과 지역복음화를 위해 한창 열정을 쏟고 있을 때 예상은 했지만 너무 일찍이 광산촌에 위기가 다가왔다. 시대의 발전과 변화에 따라 정부의 에너지 정책의 큰 변화가 온 것이다. 소위 석탄합리화 사업이다. 석유사용이 늘어나는 반면 석탄사용은 줄고 있기에 석탄생산량을 줄여야 하는데 광부들의 일자리 문제로 석탄생산량을 줄이지 못하고 지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 생산된 석탄양은 늘어 갔고 그것을 보관하기 위한 저탄장 확보는 어렵고 거기에다 관리비까지 증가됨으로 더 이상 이대로 석탄생산을 지속하는 것은 큰 문제였다. 석탄생산량을 줄이기 위하여 정부는 소위 석탄합리화 사업을 결단하여 진행하게 된 것이다.

한데 사전에 충분한 준비가 있어야 하는데 이런 것이 무시됨으로 많은 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가령 광산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폐광이 되면 이직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직업훈련을 통해 계획성 있는 이직이 이루어져야 하고 그래야 지역붕괴도 막을 수 있다. 또한 폐광할 때에 폐갱수 등 환경문제에 대한 대책을 세워야 이후 이 지역에 살아야 할 사람들에게 해가 되지 않는데 정부는 이런 사전 준비 없이 폐광을 하되, 퇴직자들에게 퇴직금과 3개월분 생활비를 보상하니 광산근로자들에게는 지금까지 만져보지 못한 몫 돈이기에 한꺼번에 많은 근로자가 퇴직을 한 것이다.

따라서 단기간에 많은 광산이 문을 닫게 되니 지역 인구가 급속하게 감소되고 지역경제가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지역에서 살 수밖에 없는 이들은 생존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래서 1999년 12월 12일 소위 태백시민 생존권을 위한 총궐기 대회가 수천명의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중앙로에서 진행되었다. 시장, 시의장 시민단체장들을 선두로 많은 이들이 삭발을 하며 '대책 없는 석탄합리화 사업으로 태백시민 다 죽는다. 태백시를 살려내라'며 소리 높여 외쳤고 거리행진을 하였다. 그러나 정부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결국 시민들은 태백역을 중심으로 철로마저 점거함으로 기차운행도 중단되었다. 이 생존권 투쟁에는 목회자들도 함께 참여 하였다. 필자가 시무하는 교회의 장로님이 시의원이다 보니 시민대표를 선임할 때 목회자도 있어야 한다며 필자를 추천함으로 시민대표로서 생존권 투쟁의 대열에 앞장서게 되었고, 후에는 정부와 협상하는 협상 테이블에도 앉게 되었다.

결국 이 생존권 투쟁으로 정부는 10년간 태백에 1조원의 돈을 지원하되 탄전지역 개발 지원법을 만들어 합법적으로 지원토록 하였다. 그리고 15년의 세월이 흘렀다. 1990년대 12만명이던 시 인구는 생존권 투쟁 시 9만명이었고, 생존권 투쟁 이후 15년이 지난 지금은 4만 7000명이 살고 있다. 10년간 1조원의 돈을 지원하겠다고 하였으나 그 약속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3000명 이상 되는 대체산업을 유치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정부는 광산지역에 내국인 출입 카지노를 허가하여 3000명 직원이 근무하고는 있으나 그리고 매일 7, 8000명이 광산촌을 찾고는 있으나 카지노로 인해 수천명이 자살하였고 수많은 가정이 파산하였다.

그래서 요즘 필자는 카지노로 인해 자주 무릎을 꿇는다. 그리고 '생존권 투쟁의 결과가 이것이란 말인가?'라며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나 자신에게 묻는다. 그때마다 '이 목사야, 목회자의 생존권과 하나님 자녀의 생존권은 하나님인 내가 보장해야 해. 알았냐?'라는 음성과 '그나마 지역주민을 위한 생존권 투쟁이었으니 봐주는 거야'라는 음성을 듣는다.

그렇다. 요즘 교회 안에서 그리고 목회자들 세계에서 생존권을 위해 투쟁해야 한다는 소리를 자주 접하게 된다. 그때마다 나는 '생존권 투쟁? 아니야. 이게 먼저가 아니야. 무릎 꿇는 것이 먼저야. 하나님이 생존권 보장해 주셔야 해'라고 나를 향해 외치곤 한다.

이상진 목사 / 황지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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