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는 것

돌아가는 것

[ 기고 ] 독자투고

최용호 장로
2015년 08월 19일(수) 17:23

새벽 고속버스를 타고 상경 길에 오르는 일이 간혹 있었다. 신춘기독공보 시 동인회 기독시인들의 모임이 있는 날에는 제백사하고 큰 일을 위하고 지키는 것처럼 행사에 다녀오곤 했었다. 피곤하고 힘든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이 여간한 기쁨이 되어서 보냈었다. 그곳에서 1박하는 것도 아니고 당일 심야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것이다.
 
심야버스에 소등이 되고 승객들은 잠이 들고 차창 밖으로 밤하늘은 환하고 무수한 별빛은 나에게 내리었다. 일교차가 심한 사막에 비스듬히 누워 별 밭을 산책하며 어느 별로 돌아간 어린 왕자를 기다리는 기분이다. 내가 붕 떠오르고 나를 내려다 보다가 내가 보이질 않는다. 궁핍함도 부유함도 없는 퍼어런 공간이다.
 
여행길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모든 것에서의 놓임이고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어떤 슬픔인 것 같다. 돌아갈 곳이 없는 사람은 나그네가 아니다. 나그네는 돌아갈 곳을 찾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세상 길을 가는 나그네가 아닌가. 나는 주님의 날을 기다리는 사람 중에 한 사람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겐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내가 섬기는 교회는 집에서 칠십 여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 늘 기도하고 말씀을 가까이 해도 근심하고 회의에 빠지고 낙심할 때가 있다. 검은 날개짓이 선한 경건을 해칠 때 혼란스런 심령에 세미하게 이어오는 진실의 회복을 눈물겹게 기다리기도 한다. 나에게 큰 축복은 주일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고 거룩한 분이 두 팔을 벌리고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이다.
 
누군가 묻는 사람이 있어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물으면 난 주일을 산다고 답한다. 요즘 세상에 싱거운 사람이라고 픽 웃고 지나칠거지만 난 돌아갈 곳이 있는 '너 하나님의 사람아'이고 싶다. 날마다 주기도문을 묵상하며 산다는 것이 나에게 얼마나 큰 기쁨인가.
 
세상을 살면서 그것이 잘못된 것을 알면서 고치지 못하고 혹은 묵인하며 합리화시키면서 사는 것들을 본다. 그러한 것들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지만 아픔과 번민 속에서도 그 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울타리에 갇혀버리고 무디어져 망각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탕자의 비유에서 어려운 중에서도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며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아들의 그 모습은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머리로만 따지고 말로만 부르짖는 웅변은 실체도 내일도 없는 허상과 상실의 길이다. 우리에게 가슴아픈 일은 잘못된 진행인 줄 알면서도 흐름에 추종하며 갈 데까지 가자는 막다른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조직화되고 경영이 도입되면 어떤 부분의 극대화는 이룰지 몰라도 영혼이 설 자리는 모호해 진다. 그래도 영혼은 의롭고 선한 주님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
 
어네스트 M. 허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의 어부 산티아고 노인은 아내가 남긴 성화가 걸린 외진 혼자만의 오두막에 돌아간다. 바다에서의 3일간의 사투 끝에 거대한 고기 뼈만 조그만 배 옆에 달고 항구로 돌아간 것이다. 너무나 힘들고 지친 노인은 숙면에 빠졌다. 거기에는 곁에서 노인을 지켜보며 항상 흐느끼는 소년 마놀린의 아름다운 영혼이 있었다. 그래도 바다와 고기잡이의 이야기를 나누며 노인의 눈빛 같은 그 소년은 왜 항상 흐느껴야 했을까.
 
노인 어부의 귀가와 그의 숙면에는 관계 속에서의 진정된 삶과 깊은 평안이 있었다. 노인은 사자꿈을 꾸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그의 오두막에 돌아간 것이다.
 
돌아가는 것은 회복이다. 돌아가는 것은 평안이다.

최용호 장로
본보 신춘문예 3회 시 당선자ㆍ영산포중앙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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