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7월 20~25일

[가정예배]7월 20~25일

[ 가정예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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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15일(수) 15:15

월-가정의 위기 극복 방법
본문 : 창 35:1~15
찬송 : 556장

야곱이 세겜 사람들이 보복할까 두려워하며 깊은 시름속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사 재차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이때 야곱이 취한 몇 가지 신앙적 결단은 가정의 위기 극복의 방법을 교훈해 준다.
 
첫째,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 둘째, 이방신상을 버렸다. 셋째, 정결케 되어야 한다. 넷째, 의복을 바꾸어야 한다.
 
의복은 그 사람의 신분이나 직업 또는 품위, 삶의 모습과 상태를 보여준다. 의복을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 입고 있던 의복을 벗어버리고 새롭고 깨끗한 것으로 갈아입으라는 것이다. 의복은 죄의 행실, 죄악의 문화를 상징한다. 불신앙적인 삶이다. 그런데 의복을 바꾸라는 것은 영적, 도덕적으로 삶의 상태를 외형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말한다.
 
모세가 출애굽 직후에 백성들에게 옷을 빨아서 입게 했고, 로마서 13장 14절은 "오직 예수그리스도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고 했다. 의복을 바꾸어 입는다는 것은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을 뜻한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잘못된 생각, 사상, 죄악에 오염된 모든 삶을 벗고 완전히 변화된 모습이어야 한다. 철저히 회개하고 회개의 합당한 열매 맺는 삶으로 벧엘의 하나님께 올라가야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받는 회복된 가정이 된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로 옷 입어야 한다. 계시록 7장에 각 나라, 족속, 백성, 방언에서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오는데 다 흰옷을 입었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다.
 
다섯째, 실행에 옮겨야 한다. 곧 벧엘로 올라가야 한다.
 
야곱은 가족을 거느리고 벧엘로 올라갔다. 벧엘이란 '하나님의 집'이다. 벧엘은 하나님께서 계시는 자리요, 하나님을 만난 자리요, 하나님께 서원하고 맹세한 자리이다. 벧엘은 첫 믿음의 자리이다. 하나님의 집은 새힘을 얻게 되는 은혜의 보금자리이다. 야곱은 '벧엘' '하나님의 집'을 찾을때, 어려운 문제가 해결되고 힘을 얻어 다시 일어나는 복을 받았다.
 
5절에 보면, 야곱 가족이 벧엘로 출발하자 그 주변 사람들에게 야곱의 일행을 두려움의 대상이 되게 하시므로 야곱의 일행을 추격하거나 감히 해할 수 없게 보호하셨다. 9절을 보면, 벧엘에 도착한 야곱가정에 하나님께서 다시 복을 주신다. 10절에는 야곱을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으로 바꿔 부르신다, 새로운 축복의 삶이 된 것이다. '벧엘'은 오늘의 교회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은 벧엘에서 우리에게 거룩한 복을 내리신다. 벧엘은 하나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찬양하며 나아가야 하는 곳이 벧엘이다.
 
오늘의 기도
 
날마다 하나님의 집에 오르므로 새로운 은혜와 축복의 삶을 누리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태현 목사
광양교회

화-감탄과 감사
본문 : 시 8:1~9
찬송 : 79장

시편 8편을 지은 시인의 마음속에 있는 두가지 감정은 감탄과 감사이다.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과 온 우주에 어찌 그리 위대하고 아름다운지요?"라며 감탄하고 있다. "저같은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제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저를 돌보시나이까?"라며 그 놀라우심을 깊이 감사하고 있다. 시인은 지금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하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인간의 행복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감탄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가슴 속에 행복이 있다. 인생의 성공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소유? 지식? 높은 권세? 다 부질없는 생각이다. 문제는 무엇을 감탄하며 또 얼마나 감사할 수 있느냐? 어디까지 감사할 수 있느냐? 얼마나 충만한 감사 속에 살고 있느냐? 감사로 생을 마감할 수 있느냐?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삶의 의미와 성공을 가늠할 수 있는 바로메타이다. 나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자주 느끼고 있는가? 
 
그런데 감탄과 감사는 어디서 나오는가? 자기정체감에서 나온다. 내가 누구인가? 내가 누구인가를 어디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은 가진 소유에 따라서 자기를 이해한다. 가진 것이 많으면 존귀해지는 것 같고, 가진 것이 적어지면 자기 존재가치가 내려가는 것처럼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일(works)에서 자기존재 가치를 찾는다. 그래서 일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가 실직하게 되면 허무감에 빠진다.
 
오늘 시편을 자세히 보면, 시인이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하나님이 만들어 두신 대자연과 우주를 보고 자신을 보는 방식이다(3절). 여기서 시인은 겸손을 배운다. 둘째는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을 생각하며 자신을 보는 방식이다(4절). 대자연과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나같이 미미한 인생을 생각하시고 돌보아주신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감사한다. 셋째는 맡겨주신 사명을 생각하며 자신을 본다(6절). 나같은 사람에게 주님이 만드신 것들을 다스리고 돌보라는 책임과 사명을 맡겨주셨으니 이 사명을 잘 감당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개발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나는 내 삶의 의미와 가치를 주로 어디서 어떻게 찾으려 했는가?
 
이제 다짐하자. 위대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내 자신의 존재 가치와 의미와 사명을 깨닫고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겠다고.
 
오늘의 기도
 
주가 만드신 우주를 보고 나를 보고 주의 거룩한 사랑과 그 십자가를 보고 또 나를 볼 수 있게 하셔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알고 내게 맡겨주신 사명을 알고 늘 감사하며 충성을 다하는 주의 사람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남정우 목사
하늘담은교회

수-십자가에 달리신 왕
본문 : 요 19:17~22
찬송 : 144장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한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구약 시대에는 선지자, 제사장, 왕을 세울 때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 예수님은 이 세 가지의 직분을 다 가진 분이다. 오늘 성경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빌라도가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패를 써 붙였다. 왕의 특징은 권세가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은 어떤 왕이신가? 예수님과 제자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최선을 다 하였지만 점점 더 위기에 빠졌다. 그들은 배 안에서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에게 잔잔하라고 하시니 바다와 바람이 잔잔해졌다. 예수님은 자연도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보리떡 몇 개로 수 천 명을 먹이셨다. 물질의 세계도 마음대로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사람들이 귀신들린 사람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을 때 예수님께서 귀신아 나오라 명령하시니 귀신이 떠나갔다. 예수님은 귀신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각종 병에 걸린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였다. 예수님은 들것에 들려온 중풍병자도 고치시고 나병환자도 고쳐주셨다. 성경은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나음을 얻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은 모든 병을 다스리시는 왕 중의 왕이시다. 예수님은 회당장의 죽은 딸을 살리셨다. 나인성에 죽어 장례 지내러가던 미망인의 아들을 살리셨다. 이미 무덤에 장례지낸 나사로도 살리셨다. 예수님은 죽은 자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왕이시다. 생명을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그런데 그 왕이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것은 인간인 우리의 죗값을 해결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죗값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죽음으로만 죗값이 해결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다 죄를 지었다. 죄의 권세는 우리 인간을 지옥 불에 던져 넣는 권세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다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었다. 만왕의 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우리를 지옥 불에 던져 넣는 죄의 권세를 부수어버리시고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권세는 죄의 권세를 깨뜨리시는 권세이다. 예수님의 피의 권세는 지옥의 권세를 깨트리시는 권세이다. 그 권세로 지옥 가게 된 우리를 구원하여 주셨다.
 
예수님이야말로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시다. 그런데 그 왕이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죄의 권세를 멸하여 우리를 건져내시기 위함이었다. 천국 가는 그 날까지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시고 이 승리의 길을 달려가자.
 
오늘의 기도
 
진정한 나의 왕은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날마다 고백하며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복 목사
천광교회

목-네 어머니라
본문 : 요 19:23~30
찬송 : 559장

우리 어머니들의 가슴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 한 조각을 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비슷하게 닮은 것이 바로 어머니의 사랑이다.
 
시편 36편 14절을 보면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라고 했다. 오늘 시편 말씀에서 유일하게 다윗은 어머니를 언급한다. 다윗은 어머니께 효도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미 돌아가셨다. 다윗은 어머니께 효도하는 길이 무엇인가를 생각하였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어머니처럼 대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른 사람을 어머니와 같이 대했다. 심지어 원수 사울까지도 어머니처럼 대하였다. 사울이 죽었을 때는 어머니가 죽었을 때처럼 통곡하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남긴 마지막 일곱 마디의 말씀 가운데 세 번째 말씀은 십자가 아래에서 자기를 지켜 보던 어머니 마리아를 향해서 "보소서 여기 아들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또한 그 곁에 있는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시기를 "네 어머니로 섬겨다오"라고 했다. 이 부탁을 받은 요한은 평생 예수님의 어머니를 자기 어머니처럼 공경해 섬겼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넓고 넓은 사랑의 메시지를 발견한다.
 
첫째, 모든 사람을 내 아들처럼 품어라.
 
십자가에 달려 고통스러워하시던 예수님께서 곁에 있던 제자 요한에게 우시는 어머니 마리아를 맡기신다. 이제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요한을 아들삼아 살아야 했다.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다. 마치 하나님이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을 아들이라 하신 것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을 아들처럼 품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원수까지도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실현해야 할 예수님의 사랑이다.
 
둘째는 모든 사람을 내 어머니처럼 섬겨라.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여기서 '보라 네 어머니라'는 말은 이제부터 네 어머니로 모시라는 뜻이다. 사도 요한은 그 때부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모시고 살았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다. 우리도 모든 사람을 어머니처럼 섬기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실현해야 할 예수님의 사랑이다.
 
교부 키프리안은 "교회를 자신의 어머니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교회는 어머니의 따뜻한 품속과 같다. 생명과 영양분이 바로 사랑이 넘치는 교회로부터 나온다. 오늘날 교회와 성도는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내 아들처럼 사랑으로 품고 내 어머니처럼 사랑으로 섬겨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본질이고 성도의 존재이유이다.
 
오늘의 기도
 
세상 모든 사람을 내 아들처럼 내 어머니처럼 섬기며 사랑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성수 목사
산울교회

금-예수님의 집중
본문 : 눅 18:35~43
찬송 : 303장

죽음을 앞두고 있다면 누구나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할 것이다.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예수님께서도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 일을 하고 계시는데, 그것은 노숙자 시각장애인 한 사람을 만나 그 사람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는데, 힘없고 소외당하는 노숙자 시각장애인 한 사람에게 집중하고 계신다. 왜일까?
 

첫째,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로, 우리를 아주 잘 알기 때문이다. 바디매오가 '무슨 일인데 이렇게 시끌벅적하냐?'고 물었더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대답한다. 이 말에는 갈릴리의 촌구석 나사렛의 촌뜨기라는 비아냥거림이 섞여 있다. 예수님께서도 노숙자 바디매오처럼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외로운지 잘 아셨기 때문에 그 한 사람에게 집중하셨다. 아버지 없이 집안의 가장으로서, 로마의 압제 아래 있는 조국의 젊은이로서, 갈릴리 주변부의 사람으로서 험난한 시대를 살았던 예수님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를 아주 잘 아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신다.
 
둘째, 새로운 삶, 변화된 삶을 위해서 집중하신다. 예수께서 집중하자 바디매오는 완전히 변화된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따르니'는 제자들이 예수를 따를 때 사용된 표현이다. 바디매오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성경에 기록되어 이 시대에도 기억되는 인물이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이 자신을 얽매는 가난과 장애로부터 벗어나길 원하셨고 자신을 위한 삶에서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길 원하셨다. 바디매오의 변화된 삶을 통해 많은 이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찬양하듯 우리의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찬양받으시길 예수님은 원하신다.
 
셋째, 사랑 때문이다. 당시 채찍에는 납이나 뼈를 넣어 만들었다. 살이 찢겨지는 건 당연하고 핏줄이 끊어져 채찍질에 죽기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예언대로 이런 고통을 당할 줄 다 아셨다. 그러나 도망가지 않고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을 향해 당당히 걸어가셨고 죽으셨다. 바로 우리 때문에 고통과 치욕을 당하셨다. 자신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셔서 모욕을 당하고 매를 맞고 죽으셨다. 자신보다 더 우리를 사랑하셔서 피 값으로 사신 우리에게 집중하신다.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남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잘 아시며 사랑하시는 예수께서 "네게 무엇 하여 주길 원하느냐?"고 물으신다. 바디매오처럼 더욱 소리 질러 간절히 예수님 찾고, 그분께 집중하며, 새롭게 변화된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리길 소원한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시선이 주님께 고정되게 하시고, 타자를 향하는 변화된 삶을 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영 목사
이주민센터 라함 대표

토-항아리 아귀까지 채운 물
본문 : 요 2:1~11
찬송 : 309장

아귀는 주둥이의 옛말이다. 물을 아귀까지 채웠다는 것은 항아리의 주둥이까지 가득하여 물을 더 이상 부을 수 없는 상태를 말한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혼인집의 하인들은 항아리 아귀까지 물을 채웠다. 이 일은 나사렛 인근 가나 마을의 어느 혼례에서 일어났다. 하객이 너무 많아 준비했던 포도주는 다 떨어지고 주인에게는 낭패의 순간이 다가왔다. 잔치에 함께 있던 모친 마리아가 예수님에게로 달려와 포도주가 떨어졌음을 전했다. 마리아는 잔칫집 하인들에게 부탁했다. "당신들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시오." 예수님은 하인들에게 항아리를 물로 채우라 하셨고 하인들은 아귀까지 채웠다.
 
물이 포도주로 변했다. 그것은 최상의 포도주였다. 마시는 사람마다 즐거워하며 또 놀라워했다. 기적이 일어났다. 물이 포도주가 된 기적에는 세 가지 사실이 존재한다. 첫째는 포도주가 떨어진 일이다. 그러나 해결 방법은 없었다. 둘째,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곳에 있었다. 기적은 예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왔다. 만약 말씀이 없었다면 항아리는 빈 채로 남았을 뿐이다. 오직 주님의 말씀으로부터 포도주가 나왔다. 셋째, 하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랐다.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는 말씀과 "이제는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는 말씀에 하인들은 순종했다. 이것이 믿음이다. 믿음이란 말씀을 의지하여 하는 행동이다.
 
물이 포도주가 된 이 사건은 우리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조건과 같다. 즉 성령이 임재하는 곳에는 세 가지 사실이 존재한다. 첫째, 목마름이다. 성령이 아니면 안되는 절대적인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 만약 성령 아닌 다른 것으로 대신할 수 있다면 성령은 오시지 않는다. 둘째, 말씀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성령을 약속하셨으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성령은 말씀을 근거로 임하신다. 셋째는 말씀을 믿고 그대로 행하는 순종이 있어야 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의지하여 성령을 기다렸다. 바로 그들에게 하나님은 성령을 부어주셨다.
 
지식이 가득하고 물질이 풍요로울수록 영혼들은 오히려 심각하게 메말라가고 있는 시대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대적인 목마름으로 성령을 구해야 한다. 혼인집 하인들처럼 우리의 영적 항아리를 채우며 기도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오늘의 기도
 
성령의 임재와 충만을 위해 목말라 간구하오니 저희 위에 부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인돈 목사
아름다운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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