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를 통해 상생과 번영의 길로

화해를 통해 상생과 번영의 길로

[ 논단 ] 주간논단

채영남 목사
2015년 07월 02일(목) 10:19

온 나라가 시끄럽다. 시민민주주의의 꽃인 국회를 비롯하여 행정, 사법 기관은 연일 갈등과 대립의 목소리만 가득하다. '네 탓'만 존재하지, '내 탓'은 그 어느 곳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중동발 '메르스'는 가시적 위험성보다도 훨씬 강력한 힘으로 '두려움'과 '불신'이 확산되어 사회 곳곳에 공포로 자리잡아 가고 있다. 그야말로 진퇴양난이다.
 
인류의 역사를 갈등과 대립의 역사로 볼 때, 더 나은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과정으로 여길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일을 향한 설레임과 기대로 지켜볼 수 없다는 점이 문제다. 불신과 다툼, 미움과 증오, 분열과 이기주의는 패망의 길로 접어가는 지름길이었다는 뼈 아픈 역사적 교훈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는 해묵은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진 것으로도 모자라, 동과 서로 갈라져 원수처럼 치열하게 대립하는 지역갈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요즘 '갑'과 '을'로 표현되는 계층과 세대간의 갈등도 사회를 좀먹어가는 암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력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해법들을 제시하는 유형들을 볼 때 답답하다 못해 헛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경제와 정치의 논리를 비롯한 온갖 수치와 법령들이 필요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화해는 수치와 법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인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이성의 영역으로 풀 수 없는 사각지대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고 했다. 사람의 감성을 두드려야 한다. 내면 깊숙이 자리잡은 그 감성이 울릴 때 문제의 해법은 쉽게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제는 교회가 나서야 한다. 사회의 불신과 분열의 코드로 교회가 자리잡고 있는 오늘의 모습으로는 희망이 없다. 다시 예수님의 정신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예수님이 희망이요, 화해의 푯대이며 사랑의 실재이시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께서 구원의 요건으로 자격과 대상을 구별하셨다면, 누가 그 은혜를 누릴 수 있겠는가? 이념과 사회적 통념, 정치와 경제적 손익을 통한 냉혹한 방법론으로는 파괴 외에는 답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화해의 방법은 오직 하나 "자기를 낮추고 죽기까지 순종(빌 2:8)"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 화해는 죽어야 가능한 일임을 의미한다. 죽지 않고서는 화해가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예수님께서 죽으셨기에 부활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로 인하여 상생과 번영으로 나아가 오늘에 이를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위대한 역사를 계승하고 이어가야 할 귀한 책임과 의무가 있는 사람들이다. 단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낮추고 죽고 순종하며 지켜가야 할 생명의 규범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손익을 계산하지 말자. 정치적인 논리보다도 예수님의 포용을 먼저 떠올리자. 경제적인 손익 그래프보다도 예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실천하자. 갈등과 대립 가운데 짓밟고 응징하는 것보다도 죽기까지 순종해보자. 이것이야말로 굳게 닫혀버린 죽음의 무덤을 딛고 생명으로 비상할 수 있는 길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죽는 그 순간까지 기억해야 할 것은 '화해'다. 우리 주님께서는 화해 없는 예배를 원하지 않으셨음(마 5:24)을 기억하자.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미움과 다툼, 갈등과 대립의 모습이 되어서는 안된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가 먼저 죽어야 한다.
 
"서로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않는 한 화해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유대의 격언에서와 같이 먼저 인정할 것은 인정하자. 상대 인격의 유무보다도 영혼을 향한 사랑으로 바라볼 때에는, 시시비비를 구분하는 것보다도 화해가 우선이 되는 기준점이 될 것이다. 이로서 천하만민을 향한 구원의 여정은 더욱 힘을 얻게 될 것으로 믿는다.

채영남 목사
본향교회ㆍ부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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