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예배] 7월 6~11일

[가정예배] 7월 6~11일

[ 가정예배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5년 07월 02일(목) 10:15

월-다 무너지리라

본문 : 마 24:1~2
찬송 : 266장

새 건물을 짓기 위해 옛 건물은 철거되어야 한다. 주님은 무너뜨려야 할 옛 성전과 새로 지어져야 할 새 성전에 대해 말씀하신다. 새 성전이란 무엇인가?


주후 530년 경, 동로마제국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수도 콘스탄티노플에 어마어마한 건물을 지었다. 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에 '하기아 소피아'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를 통해 자신의 신앙심을 드러내고자 했다.
 
건축을 마치는 날 그는 성당 한복판에 서서 이렇게 외쳤다. "솔로몬 솔로몬이여, 내가 지은 성당이 당신의 것을 뛰어 넘지 않았소?" 그러나 성 소피아 성당은 1204년 라틴족에게 빼앗겨 50여 년간 문을 닫았다. 그 후 다시 성당으로 사용되다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손에 넘어가 500년 간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이 건물은 성당이 아닌 미술 전시관으로서 터키 이스탄불의 대표적 관광지이다.
 
성 소피아 성당과 비슷한 처지였던 또 하나의 건물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은 헤롯 성전이다. 헤롯은 스룹바벨의 성전을 증축하였는데 이전보다 훨씬 더 큰 규모로서 면적은 예루살렘의 9분의 1이나 되었다. 외부공사에 약 9년이 소요되고 내부는 예수님 당시까지 46년 째 공사를 이어왔다. 공사에 동원된 인원은 1만 명이 넘는다.
 
어느 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밖으로 나올 때 제자들은 그 건물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들은 성전 건물의 웅장함에 감탄했던 것일까?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무너질 건물과 다시 그 위에 세워져야 할 성전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몸이 성전(요 2:21)"이라고 했다. "성령이 거하시는 사람이 곧 성전(고전 3:16)"이라고 했으며, "(믿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고후6:16)"이라고 말씀한다. 제자들은 성전이신 예수님과 장차 성전이 되어야 할 자신들에 대해서 깨닫지 못하고 단지 눈에 보이는 건물만 성전으로 보았다.
 
주님은 또 말씀하셨다.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헤롯이 짓는 성전은 아직 완공조차 되지 않았으나 예수님은 무너질 것을 이미 예고하셨다. 헤롯 성전은 이후 30여 년 더 공사를 했지만 완공 후 7, 8년 만에 로마 군대에 의하여 파괴되었다.
 
우리는 믿음으로 눈을 돌려 보이지 않는 성전을 봐야 한다. 보이는 성전이 무너져야 보이지 않는 성전이 보인다. 이것은 파괴가 아니라 진리가 세워지고 구원이 완성되는 과정이다. 복음이 전파되면 보이는 성전은 무너지고 보이지 않는 성전이 세워진다. "다 무너지리라!" 주님이 말씀하셨다.
 
오늘의 기도
 
언젠가 보이는 것들은 무너지겠지만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성전으로 인하여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주님을 향한 진정한 예배자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황인돈 목사
아름다운교회

화-찾아가시는 예수님

본문 : 눅 5:1~11
찬송 : 96장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부터 본문까지를 보면, 동네 안으로, 회당 안으로, 집 안으로 들어가셨다. 사람들을 만나 가르치고, 병을 고쳐주기 위해 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다. 한적한 곳에 계실 때는 홀로 하나님을 만날 때였다. 그런데 1절을 보면 기도할 목적이 아닌데 게네사렛 호숫가로 가셨다. 시몬 베드로 때문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기 장모까지 고쳐주신 '구원의 주, 능력의 주'를 봤지만, 자기 일을 하려고 호숫가로 가버렸다. 무리들은 발 디딜 틈 없이 예수님을 찾아 호숫가까지 왔지만, 정작 베드로는 자기랑은 아무 상관없는 듯 빈 그물만 씻고 있다. 이런 그를 왜 찾아가셨을까?
 
첫째, 능력의 주, 구원의 주를 보기는 보았으나 삶의 중심에 들이지 못하고 겉돌며 자신을 온전히 내어놓지 못하는 사람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서 찾아가셨다. 베드로는 기적의 장소에 있었지만 주님을 온전히 만나지 못했고, 놀라운 기적은 자신의 것이 되지 못했다. 빈 그물, 빈 배였다. 그리스도가 삶의 중심에 있느냐, 없느냐, 삶을 주님을 위해 내어드리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차이는 크다. 빈 배가 말씀이 임한 후 '만선'이 되었다. 주님은 오늘도 자기 백성을 인격적으로 만나길 원해 찾아가신다.
 
둘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기 위해 찾아가셨다. 하나님을 만나면 부딪히게 되는 첫 문제는 '죄'이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존전에 설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십자가만이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 예수만이 하나님께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죄에서 사유함을 받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기 위해 찾아가셨다. 그러므로 날마다 피 묻은 십자가를 통해 담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벧전 1:16)"는 말씀을 기억하며, 경건에 이르기를 단련하고, 승리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항상 의지하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셋째,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끼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게 하기 위해서 찾아가셨다. 제자로 부르시기 위해 찾아가셨다. 베드로를 통해 그곳에 같이 있던 야고보, 요한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사람 낚는 어부 베드로를 통해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사도 베드로를 통해 복음이 힘 있게 증거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사람 낚는 어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들이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는 것을 듣기 원하신다.
 
오늘의 기도
 
인격적으로 만나기 위해 찾아오시는 주님을 오늘도 깊이 있게 만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안영 목사
이주민센터 라함 대표

수-진영을 거룩하게 하라
본문 : 신 23:9~14
찬송 : 455장

메르스로 인하여 민족 전체가 걱정을 하고 있다. 전염병과 싸우고 있는 이 때 하나님은 "진영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진영을 거룩하게 하는 구체적인 방안으로 세 가지를 지시하신다. 첫째, 악한 일을 스스로 삼가라. 신명기 23장 전체를 보면 악한 일이란,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들을 억울하게 만드는 일을 의미한다. 둘째 위생을 청결하게 하라. 불결하지 않게 씻어라. 셋째, 환경을 깨끗하게 하라. 진영에서 대소변을 볼 때 흙으로 덮어서 불결하지 않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진영을 거룩하게 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14절을 보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하시고 떠나지 아니하시기 위함이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셔야 승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우리는 우리의 진영을 거룩하게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진영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을 우리에게 적용해 보자. 첫째는 우리의 몸을 거룩하게 가꾸는 일이다. 바울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몸은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음란하지 마라, 음란한 것을 보지도 마라. 위생적으로 청결하게 자신의 몸을 관리하자. 착한 일, 감사한 일들을 많이 생각하자. 그리고 칭찬하는 말을 많이 하자. 그리하여 성령님이 언제든지 내 마음과 입술과 몸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해 나가실 수 있도록 몸을 거룩하게 가꾸자. 둘째는 우리의 환경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는 일이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고 아름다우신 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우리의 집과 주위 환경을 깨끗하게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셋째, 우리 민족을 거룩하게 가꾸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동성애를 반대해야 한다. 물론 동성애자들과 그 부모를 긍휼히 여기며 이들을 위하여 사랑으로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동성애 법안은 우리 자녀와 그 부모와 우리 민족을 불행하게 만드는 일이다. 적극 반대해야 한다.
 
거룩이 우리의 능력이다. 하나님은 거룩하게 사는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능력을 보여주시며 승리를 주시며 다스리게 해오셨다. 주후 3-4세기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로마제국을 변화시킨 것은 다름 아닌 거룩한 삶의 힘이었다. 거룩하게 살면 하나님이 전염병도 전쟁도 고난도 이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네 진영을 거룩히 하라 그리하면 네게서 불결한 것을 보시지 않으므로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리라."
 
오늘의 기도
 
하나님의 자녀답게 거룩하게 살겠습니다. 나 자신과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에 앞장서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남정우 목사
하늘담은교회

목-가정의 위기 극복 방법
본문 : 창 35:1~15
찬송 : 557장

우리나라가 OECD 34개 회원국 중에서 1위를 차지하는 불명예스러운 것들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 중 가정과 관계된 것이 많다. 이혼율, 자살률(노인, 남성, 여성, 청소년 자살률도 1위), 청소년 가출, 낙태율, 성범죄율, 청소년 불행지수, 노인 빈곤율, 4~50대 남성 사망률, 주부 가출율 등이다. 실로 가정의 위기시대이다. 어느 가정이든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위기는 찾아오는데 중요한 것은 위기대처 능력이며 위기 극복 방법이다. 믿음의 조상 야곱의 가정도 수 차례 위기를 맞는 때가 있었다. 그런데 야곱의 가정이 위기를 극복한 방법은 우리들에게 큰 교훈을 준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벧엘에서의 서원을 상기시키시며 벧엘로 가라는 명령을 하신다. 그러나 야곱은 벧엘로 가는 중에 가까운 세겜 땅에서 10여년을 정착하게 된다. 세겜과 벧엘의 거리는 41km정도로 하룻길 남짓한 거리이다. 이때 야곱가정에 큰 위기가 닥쳐온다. 외동 딸 디나가 세겜 추장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리고 아들들이 세겜 사람들을 속여 남자들이 할례를 받게 한 후 그들을 살육하고 부녀자를 사로잡고 모든 재산을 노략한다. 이 일로 인하여 야곱 가정은 보복을 당할 위기에 봉착한다. 야곱이 깊은 좌절과 고통과 시름 속에서 고민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개입하사 재차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령하신다. 이때 야곱은 몇 가지 신앙적 결단을 내린다.
 
첫째, 야곱은 자기의 잘못을 깨달았다. 야곱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먼저 자신의 잘못을 깨달았다. 벧엘로 올라가지 않고 세겜에 머물고 있는 영적 나태함이 원인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리고 조부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계승자로서 인정과 영적 축복은 받았지만 여전히 그의 삶은 세상과 벗하며 죄 가운데 머물러 있음을 돌이키게 된 것이다. 또한 일찍이 밧단아람으로 도피하면서 하나님께 서원하였던 벧엘에서의 약속을 잊고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뜨거운 믿음을 잃어버려 첫 신앙의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 가나안 귀환 이후 한동안 침묵하셨던 하나님이 징계의 채찍을 통해서라도 강권적으로 하나님 자신과의 관계를 회복케 하시고, 자신의 뜻 안으로 들어오게 하시는 변함없는 사랑을 깨닫게 된다.
 
이런 자신의 깨달음이 가정을 위기에서 구하고 은혜와 축복의 자리로 나가는 시작이 되었다. 이처럼 우리의 가정들도 위기를 당할때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가정에 문제가 터지고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 먼저 자신에게 원인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가정의 위기는 가정을 건강하게 바로 세우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자신에게서 원인과 이유를 찾고 고침으로서 건강하고 행복한 가정을 세워갈 수 있음을 기억하자.
 
오늘의 기도
 
가정의 문제와 위기의 원인이 나자신에게 있음을 고백합니다. 건강하고 복된 가정으로 회복시켜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윤태현 목사
광양교회

금-맥추절을 지키라
본문 : 출 23:14~17
찬송 : 568장

오늘 성경에는 세 가지의 절기를 지킬 것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첫째는 무교절로 애굽에서 해방된 것을 감사하는 절기며, 둘째는 맥추절로 그해 첫 수확을 감사하는 절기며, 마지막은 연말에 추수한 것을 저장하고 지키는 수장절로 역시 감사절이다. 감사로 시작하여 감사로 살다가 감사로 한해를 마무리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절기마다 감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범사에 감사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 전부는 받아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서해안에 간 일이 있다. 작년에 많던 미역이 별로 없고 바위에 붙어있는 톳도 10분의 1 크기로 자라지 못하고 있다. 비가 오지 않아서 바닷물의 소금 농도가 높아져서 그렇단다. 또 염전을 갔는데 가물어서 소금이 많이 생산되지만 소금의 맛이 떨어지고 질이 나빠졌다며 비가 오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것을 들었다. 비가 오지 않으면 바다도 육지도 다 죽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우리는 사는 것이다.
 
왜 낮과 밤은 교차하면서 있는 것인가? 낮이 있어야 식물들이 햇빛을 받아서 열매를 만든다. 그러나 밤이 없어도 식물은 열매를 맺지 못한다. 가로등 밑에 호박이나 들깨를 심어놓으면 밤도 낮인 줄 알고 신나게 자라고 꽃도 핀다. 그러나 열매는 없다. 그러면 누가 낮과 밤을 교차로 만든 것인가? 하나님이시다. 지구상의 열매의 약 60% 이상은 벌과 나비같은 곤충이 수정을 시켜주어서 열매를 맺는다. 만약에 벌과 나비가 없다면 지금 우리가 거두는 열매의 60%정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여 살리는 농사꾼인 벌과 나비를 만드셔서 우리가 먹을 것을 농사지어 주신다.
 
우리는 받아서 산다. 지구와 태양의 거리는 약 30만㎞이다 이 거리를 항상 유지하고 있어야 한다. 이보다 너무 가까우면 우리는 타 죽을 것이고 이보다 더 멀어지면 우리는 얼어서 죽을 것이다. 태양의 표면 온도는 약 6000도이다. 이보다 급격히 뜨겁거나 낮은 온도가 되면 우리는 살아남지 못한다. 일정한 온도로 불타도록 누군가 불을 관리해야 한다.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는 우리가 사는 지구는 365일 5시간 48분 46초의 주기로 돌고 있다. 그 속도는 초당 약 30㎞이다. 갑자기 빨리 가거나 반대로 너무 느리게 가면 우리는 살 수 없다. 태양은 바다를 말려서 구름을 만들고 바람은 그 구름을 육지로 운반하고 비를 내려 산꼭대기 풀과 나무에 물을 주며 논밭을 적신다. 비는 인간들이 오염시킨 하늘을 청소하여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갈 파란 하늘을 만들어 주고, 오염된 강을 청소하여 바다로 몰고 가서 바다의 소금물로 소독한다. 절기 때만 감사가 아니라 숨 한번 쉬는 순간에도 우리는 감사하며 살아야 할 우리이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늘 살 생명을 받아서 살고 있음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명복 목사
천광교회

토-점점 커지는 예수님
본문 : 요 3:22~30
찬송 : 80장

우리는 정말 남을 인정하기 힘든 죄성을 가진 사람들이다. 특히 경쟁이 가득한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남의 불행이 나의 행복인 시대, 남을 끌어내려야만 내가 올라갈 수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남을 인정해주기란 어렵다.
 
세례요한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다. 예수님께선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라고 극찬을 하셨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요한의 또 다른 특별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세례요한의 예수에 대한 태도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이는 "그분은 점점 커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 내게서 '예수님이 점점 커지는 것'은 '내가 점점 작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점점 작아질 때 예수님은 점점 커진다는 진리이다. 세례요한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메시야가 나타나시자 자신은 그동안 짊어지고 가던 무거운 사명을 내려놓기로 했다. 자기가 계속 짊어지고 간다면, 오히려 주에게 짐이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을 높일 수 있는 일을 중단했다. 그는 예수님을 점점 커지게 하고 결국 순교자의 길을 갔다.
 
주후 251년-356까지 살았던 성 안토니우스는 모든 수도자의 아버지라고 불려진다. 배움을 전혀 받지 않았던 그는 20세에 마태복음 19장 21절 말씀을 읽고, 삶으로 실천하고자 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고, 가족을 등진 채 수도의 삶을 시작했다. 20세부터 35세까지 마을근처 무덤 속에서 수도를 하였는데, 환상과 실체를 체험하는 경이로운 수도의 삶을 실천한 자이다. 안토니는 35세에 피스피르라는 산으로 거처를 옮겨 55세까지 20년간 수도에 정진한다. 그가 105세의 나이로 죽기까지 피스피르와 오아시스를 오가며 수도의 삶을 실천했다고 한다. 그의 일화 가운데 그가 거지를 품에 안았는데 점점 커지더라는 것이다. 나중에 보니 그 거지가 예수님이더라는 것이다. 자기의 품에서 점점 커진 예수님!
 
오늘날 목회자와 성도들이 받는 가장 큰 유혹 중에 하나는 짧은 시간에 교회를 크게 만들고 싶은 강박관념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교회가 커지기 이전에 예수님이 커져야 하지 않겠는가? 참된교회는 교회가 커지기 이전에 예수님 점점 커지는 교회이다. 목사로부터 온 교우가 점점 작아지면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오늘의 기도
 
예수님, 내게서 점점 커지시옵소서. 나는 점점 작아지겠나이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성수 목사
산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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