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대림절 설교를 위한 개요 II : 임마누엘의 기쁨과 마리아의 구속사적 의의

<23> 대림절 설교를 위한 개요 II : 임마누엘의 기쁨과 마리아의 구속사적 의의

[ 이야기가 있는 예배 ] 이야기가 있는 예배와 목회

김명실 교수
2015년 06월 09일(화) 08:39
▲ 마리아가 천사가 전하는 말을 깨닫고 순종할 수 있었던 것은 성령의 도우심이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그림. 장 에(Jean Hey) 作, 1490-5

'기쁨의 주일(Gaudete Sunday)'이라 불리는 대림절 셋째 주일은 종말론적 메시지들로 인해 엄숙함이 가득했던 대림절 초기의 분위기와 대조를 이룬다. 라틴어 가우데테(Gaudete)는 '기뻐하라(Rejoice)'라는 뜻이며, 빌립보서 4장 4~6절의 말씀으로 노래하며 예배를 시작한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님이 가까이 계시다" 진정 성탄의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이 날에 대림절 초는 물론 집례자의 예복까지도 장미색으로 선택하는 교회들이 있지만, 장미색의 초나 예복의 사용여부와 관계없이 이 날은 '기쁨의 주일'로 불리며 재림을 기다리던 것에서 성탄을 기다리는 즐거움과 기쁨이 표현된다. 이것은 공동성서정과 속에도 반영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Year A는 이사야 35장 1~10절, Year B는 데살로니가전서 5장 16~24절, Year C는 빌립보서 4장 4~6절을 통해 기뻐할 것을 강권하고 있다.

넷째 주일 설교는 대림절 기간 동안의 모든 약속들이 마리아를 통해 구체화되는 것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성탄선물들을 나누며 사람들은 이미 분주해졌겠지만, 교회는 '오소서'라는 찬송으로 오랫동안 기다렸던 예수님을 맞을 경건한 준비를 본격화한다. 임마누엘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나는 한 아기로 인해 대림의 끝이 새로운 역사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임마누엘이 되어 "우리와 함께 있게"된다는 예언이 성취되는 시간이다. 넷째 주일은 마리아의 순종과 찬양이 중심 메시지이기에, 공동성서정과 3년 모두 수태고지에 관한 내용이 주요본문들이다(마 1:18-25, 눅 1:26-38, 1:39-45). 한편 이 날의 시편을 대신해서 누가복음 14장 7~55절의 마리아의 찬양이 읽히거나 노래로 불리는데, 간혹 셋째 주일에 들려지기도 한다.

여기서 잠시 마리아에 대해 생각해보자. 로마 가톨릭이 마리아에게 지나치게 비약된 위상을 주었다면, 대부분의 개신교 교회들은 지나칠 정도의 부정적 반응을 보인다. 넷째 주일은 임마누엘로 오실 아기 예수만큼이나 마리아에 대한 강조도 중요한데, 예수님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의 신앙적 결단과 순종 없이 이 역사가 결코 이뤄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리아에게 임한 수태고지 사건은 기억되고 기념될 필요가 있다.

역사적으로 이 사건은 일 년에 두 번 기념되었는데, 한 번은 대림절 넷째 주일이고, 또 한 번은 3월 25일이다. 옛날에는 임신기간을 9개월로 산정했기에 12월 25일 보다 9개월 앞선 3월 25일이 잉태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656년, 톨레도(Toledo) 공의회는 이 수태고지의 기념일을 12월 18일로 정하였지만, 각 '관습에 따라'라고 조건을 달았다. 그래서 암브로스의 예전(Ambrosian Rite)은 수태고지를 대림절 마지막 주일에 기념하였고, 현대 서방교회 교회력에 큰 영향을 미쳤다. 마리아에 관한 성경의 증언들과 그 구속사적 의의를 축소시키는 방법 보다는 올바른 해석을 통한 과감한 선포를 통해 개신교 신학과 예배의 정체성을 바르게 세워나가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또한 마리아에 대한 로마 가톨릭의 입장을 무조건적으로 비판하기 보다는 우리의 신학과 실천을 제시하며 대화하는 것이 보다 바람직하고 생산적일 것이다.

김명실 교수 / 영남신대ㆍ예배와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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