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예배

<16> 예수님의 승천을 기념하는 예배

[ 이야기가 있는 예배 ] 이야기가 있는 예배와 목회

김명실 교수
2015년 04월 20일(월) 18:53
   
▲ 귀스타브 도레 作 '예수의 승천'.

"예수님이 이 땅에 '부재'함을 알리는 중요한 의례"

부활하신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 만일 감람산이라는 곳에서, 그것도 제자들의 눈앞에서 예수님이 승천했다는 성경의 증언이 없었다면 우리는 아직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위해 이곳저곳을 찾아 헤매고 다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더 이상 계시지 않기에 '다시 오실' 그 분을 기다리며 성실하게 일상생활에 전념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역사의 초기부터 이 승천일(부활 후 40일), 혹은 승천주일(부활 후 43일)을 기념해왔다. 하지만 승천이라는 사건은 너무도 드라마틱해서 예배에서 다루기에는 매우 조심스럽고 부담스러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승천과 재림을 강조했던 많은 이단들을 경험한 한국교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래서인지 승천과 재림 등의 종말론적 주제들이 언제부터인가 한국교회의 예배와 설교의 자리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고대교회에서부터 이 성경적 증언을 예배의 자리로 옮겨왔다. 예루살렘 교회는 물론 대부분의 교회들이 오순절(성령강림주일)을 열흘 앞두고도 승천을 따로 구분하여 크게 경축하였는데,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우주적 잔치라고 하였고 심지어 어거스틴은 이것이 초대교회 때도 있었던 사도적 예전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사도적 전통은 오늘날에도 기독교 주류 교단들 속에서 이어지고 있는데, 그 신학적 강조점은 영화롭게 된 '몸'에 대한 것이다. 부활하신 몸 그대로 승천하시는 예수님의 몸은  '성육신의 절정'이며 '궁극적인 인간의 몸'이라는 것인데, 이와 같은 몸이 신자들에게도 보장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의 승천을 그린 대부분의 성화들의 전통적인 특징은 그 몸을 최대한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특징은 오른손을 들어 땅 아래의 사람들을 향해 축복하는 예수님의 모습인데, 이는 지상의 모든 교회들을 위한 축복을 뜻한다. 승천의 목적 중 하나는 우리의 처소를 마련하기 위함(요한 14:2)이라고 하셨는데, 자칫 하나님의 나라를 특정한 공간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승천은 성경적이고 사도적인 사건이기에 반드시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성령 안에서 우리와 늘 함께 계시기에 승천을 기념하는 것은 불필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와 늘 함께 한다는 내재적 신앙만이 강조되면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종말론적 신앙이 약해지게 된다. 개혁교회 신앙고백서 중 하나인 제2 스위스 신앙고백서도 승천하신 예수님은 더 이상 인성을 가진 자로서 이 세상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 땅에서의 예수님의 '부재'를 인식하면서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통한 주님의 '임재'를 사모하며, 나아가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고대하게 된다. 그러므로 반드시 예수의 몸의 승천과 그 신학적 의의가 기독교 예배의 자리에서 들려져야 할 것이다.

김명실 교수 / 영남신대ㆍ예배와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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