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어필, 누구를 위해?

하나님의 어필, 누구를 위해?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

장순애 교수
2015년 02월 24일(화) 08:38

"요나야! 니느웨에 가서 내 말좀 전해다오" 하나님께서 요나를 부르셨어요. 그러나 요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오히려 다시스로 도망가고 싶었어요. 그래서 배를 탔지요. 한참 가는데 큰 풍랑이 일어났고 배가 뒤집히려고 해요. 도대체 누구 때문일까? 제비를 뽑았더니 요나가 뽑혔어요. "내가 잘못했어요. 나를 저 바다에 던져 넣으세요. 그러면 바다가 잔잔해 질 거에요" 사람들은 요나를 바다에 던졌고 큰 물고기가 요나를 삼켰어요. 죽지않고 산 채로 큰 물고기 뱃속에서 요나는 삼일 동안 회개기도를 했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그러던 중 물고기가 니느웨 근처 바닷가에서 요나를 다시 뱉었어요.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했고 니느웨 사람들은 회개했어요.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용서해 주셨어요.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고 좋아하던 이야기이고 교회학교 교사가 된 후 여러번 가르친 이야기다. 하지만 요나서를 '이런 식으로' 전하는 것에는 몇 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다. 무엇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다. 그런데 위의 이야기는 하나님 주어를 단 한번 사용할 뿐, 이야기 전체를 요나 주어 중심, 심지어 풍랑과 큰 물고기 주어를 내세우며 진행하고 있다. 성경엔 그렇게 되어 있지않다. 풍랑이 스스로 일어나 거칠어진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셨다.(1:4) 물고기가 요나를 삼킨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큰 물고기를 예비하시고 요나를 삼키게 하셨다.(1:17)

뿐만 아니라 요나가 다시스로 도망가려 하고 배를 탄 것도 '여호와의 얼굴을 피하려고'(1:3)라면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일어난 일로 강조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주 하나님을 슬쩍 빼버리고 인간 주어, 심지어는 풍랑이나 큰 물고기 주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성경을 가르친다는 것은 하나님은 누구시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가르치는 것이다. 아무리 재미있어도 하나님 주어를 슬쩍 넘어가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여기는 이야기는 듣는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신앙하도록 돕는 힘이 약하다.

위의 이야기는 또 물고기 뱃속에서 드린 요나의 기도가 회개기도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요나서 2장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 서원의 기도이다. 물론 감사와 서원에는 회개가 깔려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기도는 '회개합니다. 용서해 주세요'를 문자적으로 담고있지도, 강조하지도 않는다. 뿐만 아니라 3장, 특히 4장에서의 요나의 행동을 보건대 2장에서 요나가 철저히 혹은 제대로 회개했다고 보기는 좀 힘들다.

또 교회학교에서 많이 다루지 않는 4장에는 하나님 주어가 여러차례 반복된다. 4장에서 하나님은 바쁘시다. 화내는 요나에게 '여호와'께서 물으신다(4, 9절). '여호와'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신다. 요나의 괴로움을 면케하신다.(6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신다. '하나님'이 갉아먹게 하신다.(7절)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신다(8절) '여호와'께서 '내가 어찌 니느웨를 아끼지 아니하겠느냐'고 하소연 하신다.(11절) 그런데 4장의 하나님은 도대체 왜 이리 분주하신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하나님은 왜 이리도 구체적으로, 반복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어필하시는가? 성경을 읽되, 기록되어진대로 읽고, 질문하면서 읽는 교사가 그립다.

장순애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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