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폭력을 치유하라 (1)폭력, 무엇인가

교회, 폭력을 치유하라 (1)폭력, 무엇인가

[ 특집 ]

정주진 박사 특집
2015년 02월 10일(화) 15:27

정주진 소장
평화갈등연구소

 
'평화'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설사 대부분의 관심이 애매모호한 상태에 머물러 있어도 관심이 없는 것보다는 당연히 나은 일이다. 그렇지만 평화를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우리 사회에 평화 교육이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 평화에 관심을 가지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폭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평화의 질과 수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이 폭력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동체나 사회의 평화를 가늠하려면 그 공동체나 사회가 어느 수준과 질의 폭력에 노출돼 있는지를 봐야한다. 또한 평화의 질과 수준을 높일 가능성을 가늠하려면 그 공동체나 사회가 폭력을 없앨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가지고 있고 실천에 옮길 의지가 있는지를 봐야한다. 결국 평화에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폭력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평화의 반대는 전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평화의 반대는 폭력이다. 전쟁은 폭력의 하나로 가장 극단적이고 가시적인 예에 불과하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전쟁 외에도 수많은 폭력이 있기 때문에 전쟁이 없다고 평화가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한반도에는 남북 사이에 첨예한 대결이 있지만 전쟁은 없다. 그래서 한반도는 평화로운가? 지구상에는 전쟁이 없는 사회가 더 많다. 그래서 그 사회들은 모두 평화로운가? 대답은 물론 그렇지 않다.

전쟁이 없어도 평화롭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 수많은 폭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폭력 중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는 쉽게 찾기 힘든 폭력이 더 많다. 사람들의 지식과 상식 수준이 높은 사회일수록, 그리고 구조가 복잡한 사회일수록 비가시적인 폭력이 더 많다.

눈에 보이는 폭력은 직접적 폭력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누군가 다른 사람의 신체에 직접 해를 입히는 폭력을 말한다. 당연히 눈에 띄기 마련이고 즉각 피해가 생긴다. 그런데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조적 폭력도 있다. 이것은 사회의 뼈대 역할을 하는 사회 구조가 잘못 작동하거나 악용될 때 가해지는 폭력이다. 구조적 폭력은 눈에 잘 보이지 않을뿐만 아니라 잘못된 구조의 진원이 어디고 누가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그보다 더 보이지 않게 꽁꽁 숨겨져 있는 폭력도 있다. 바로 문화적 폭력이다. 이것은 철학, 종교, 담론, 예술, 사회문화, 전통 등을 통해 가해지는 폭력이다. 인간 삶의 질을 높이는데 기여한다고 여겨지는 문화가 폭력의 수단이 되는 경우는 의외로 많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화적 폭력의 존재 자체를 상상하지 못하거나 드러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흔하다.

폭력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어린이집 폭행 사건을 생각해보자. 어린이집 교사가 아이들을 때린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구분하자면 신체에 직접 해를 가한 직접적 폭력이다.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그 이면에는 구조적 폭력이 있다. 자격이 안 되는 사람들이 어린이집에서 일할 수 있게 만든 허술한 법, 그리고 반복적인 아동 폭행을 방치하는 사회 체계는 어린이집의 폭행이 우리사회의 폭력적 구조에서 비롯됐음을 말해준다. 아이들을 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만든 어린이집의 허술한 관리체계, 폭행 교사들의 행동을 승인 또는 묵인하는 동료 교사들을 징계하지 않는 구조, 교사들에 대한 열악한 처우 등도 구조의 악용 또는 비작동 문제를 드러냈다. 어린이집을 만들고 지원하는 법체계를 만든 것, 어린이집을 운영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지만 반복되는 폭행 사건을 묵인하고 방치하는 폭력적 구조가 문제인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폭력이다. 그런데 교사의 폭행, 폭언을 좀 더 분석해보면 거기에는 뿌리 깊은 문화적 폭력이 있다. 바로 교사는 아이들을 자기 맘대로 다룰 수 있고 아이들은 교사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한국문화다. 아마 피해 아동의 부모들조차 아침마다 아이들에게 '선생님 말씀 잘 들어'라고 당부하며 보냈을 것이다. 부정적인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교사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는 문화적 억압과 강요가 내포돼 있고 그것은 실제로 아이들에게 압력이 된다. 복종을 강요하는 행위는 원칙적으로 폭력이고, 문제가 된 어린이집에서도 교사에 대한 절대적 복종이 강요됐기 때문에 명백한 문화적 폭력이 가해진 셈이다. 사실 다양한 교육 공간에서 가해지는 이런 문화적 폭력에 다양한 연령층의 학생들이 매일 희생되고 있는 것이 한국사회의 현실이다.

폭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희생이 발생하고 있음을, 곧 누군가가 희생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평화가 폭력에 관심을 가져야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된다. 평화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진행 중인 폭력에 의한 희생을 중단하고 더 이상의 희생을 막는 것이다. 이것은 평화 성취의 목표 중 하나가 됨과 동시에 평화가 가장 기본적인 목표로 삼는 것이다. 이것을 토대로 평화는 폭력 및 희생의 재발을 막고 희생자의 삶이 회복되고 나아가 과거의 희생자와 가해자 사이에 관계가 회복돼 평화로운 공존이 성취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는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폭력은 평화의 부재를 야기하는 원인이 됨과 동시에 평화를 이뤄야 하는 이유가 된다.

기독교인이 평화에 관심을 가지고 평화를 이루는데, 다시 말해 폭력의 희생을 줄이고 희생자의 삶을 회복시키는데 나서야 하는 이유는 어찌보면 간단하다.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이 관통하고 있는 희생당하는 약자에 대한 지지와 지원을 실현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평화에 대한 기독교인의 관심과 평화를 위한 노력은 폭력 현상의 중단을 넘어 희생을 야기하는 근본 원인의 탐색과 제거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것이 희생의 재발을 막고 희생자의 삶을 회복시키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희생되는 약자에 진정으로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기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폭력은 많은 경우 법적 절차를 통해서도 다뤄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법은 폭력의 근본원인인 부당한 힘의 관계를 개선시키지 못하고 관계의 문제에 관심도 없다는 것이다. 관계의 개선으로 공동체를 회복하는 것에는 더욱 관심이 없다. 결국 관계와 공동체는 폭력의 발생 자체보다 폭력의 희생자, 그리고 희생자의 현재와 미래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다뤄야할 문제인 것이다.

물론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폭력을 야기하는 힘의 관계와 희생, 관계의 바로잡음과 회복, 희생자의 삶의 회복과 공동체의 회복에 관심을 갖는다. 그렇지만 기독교인에게는 어떤 것보다도 중요한 성서에 근거한 사명과 책임이 부여돼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평화를 위해 일하게 하는 귀중한 토대가 된다.

폭력을 없애고 평화를 성취하기 위해 일할 때 명심해야 하는 근본적인 질문은 '누구를 위한 평화인가'이다. 폭력적 상황에서 절실하게 평화를 필요로 하는 사람은 희생자고 희생자의 존재는 평화의 필요성과 정당성을 증명해준다. 그럼에도 평화는 강자에 의해 왜곡되고 강자의 이익에 봉사할 가능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 이것은 여전히 폭력이 힘을 발휘하고 있다는 증거지만 사람들은 강자에 의해 부과되거나 강요되는 평화를 '진짜 평화'로 착각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렇게 왜곡된 평화를 지지하고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기도 한다. 이런 왜곡된 평화는 무엇보다 희생자를 위해 거부돼야 한다. 특별히 기독교인은 항상 이런 왜곡된 평화를 강력히 거부하고 '누구의 평화인가'라고 질문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서의 가르침을 따르는 신앙인의 양심이기 때문이고 어떤 경우에도 포기해서는 안 되는 기독교인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런 신앙적 토대 때문에 기독교인은 그 어느 누구보다 폭력의 제거와 평화의 성취에 기여할 수 있는 큰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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