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연합운동을 위한 제언 (2)백년대계, 지금이 가장 빠른 때

교회 연합운동을 위한 제언 (2)백년대계, 지금이 가장 빠른 때

[ 특집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5년 01월 27일(화) 16:29

김혜숙 목사
전국여교역자
연합회 사무총장

 
한국교회 에큐메니칼 운동의 시작은 선교사들의 선교협력에서 시작됐다. 성경번역사업으로 시작된 선교협력은 1905년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연합하여 선교잡지 'The Korean Mission Field' 와 '대한 그리스도 신문'을 발간하고, 1908년에는 합동찬송가 출간으로까지 이어졌다. 그러다가 토착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연합하여 세우고 한국 내에 단일 개신교를 만들려는 시도까지 있었으나 그것은 이뤄지지 못하고 교파, 교단들의 연합 사업으로 그 발전 방향을 잡게 되었다. 초기 선교지 분할문제, 성서공회의 설립,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탄생으로 한국 개신교는 그 시작부터 에큐메니칼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최근 개신교의 이러한 에큐메니칼 교회로서의 모습이 자꾸만 불협화음을 내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이번 NCCK의 총무 선임건에 관련해서 일어났다. 임기 중 정년에 걸리기 때문에 총무 후보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본교단은 판단했는데 루터교단을 제외한 다른 교단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이번에 우리는 옳은 주장(원칙)이라도 다수가 그 말을 경청하지 않는 현실을 경험했고 다른 교단으로부터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을까? 왜 우리는 옳은 주장을 하면서도 그 주장대로 관철시키지 못한 것일까?

이유는 많겠지만 그 중 두 가지가 떠오른다. 하나는 잘못된 관행과 새로운 사고의 대립이다. 그 동안 연합운동 내에서도 자유로운 토론이 이뤄지기 보다는 몇몇의 사람들에 의해 방향이 정해지고 사람이 선임되면 대체적으로 이의를 달지 않고 그대로 수용하는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제 개 교단이 혹은 개인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토론을 하고 그 과정에서 합의를 도출해내는 민주적인 절차와 방법을 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래서 이번 NCCK 총무 선임 건도 마찬가지의 갈등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이미 초교파적으로 연합운동의 방향을 잡는 그룹들이 형성되어 있고 그 그룹들에 의해 이미 차기 총무가 선정되고 그 시나리오대로 움직여갔던 형국이 된 것은 아닌가 한다. 이미 결정된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새로운 사람을 세우는 것에 아무리 원칙대로라고 하더라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 원인으로 떠오르는 것은 그러한 에큐메니칼 진영의 실체를 파악하고 적절하게 대응하며 타교단의 다른 사람들도 설득해내는 에큐메니칼 지도력의 부재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약간의 피해의식이 있었다. 우리가 늘 물질적인 기여는 많이 하는데 실질적으로 그러한 영향력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현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른 교단 사람들의 이야기는 오히려 반대의 목소리였다. 우리가 물질적인 기여를 많이 한다고 그 영향력을 행세해 왔다는 것이다. 서로의 입장차이로 인해 똑같은 상황에 대해 다르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하튼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난 과거를 논하기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 목적은 단지 영향력의 확대를 위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단적으로 말하면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야겠고 그것이 정의롭고 민주적인 방법을 통해 이루어지도록 우리가 할 역할이 크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시금 에큐메니칼 운동의 백년대계로서 지도력 양성의 문제를 꺼내지 않을 수 없다.

에큐메니칼 운동이란 무엇인가?

이화여대 장윤재 교수는 과거 한 강연에서 에큐메니칼 운동을 정의하기를 "교파적 신앙고백의 부분성을 인정하고 세계적 지평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을 이루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고전 12:25) 하려는 정신이고 문화이자 운동이다. 그것은 자기 초월, 자기 비움의 행위이기도 하다"고 하면서 에큐메니칼은 철저한 에반젤리칼이라고 강조했다.

즉 에반젤리칼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최우선시하고 그것에 나의 모든 것을 헌신한다는 말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하신 그의 말씀(눅 4:18~19)에 잘 나타나 있고, 그것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고 눈먼 자를 다시 보게 하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복음적 이상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에큐메니칼 운동이 최우선의 가치로 추구해 온 것이었다. 따라서 장윤재 교수는 에큐메니칼 운동이 탈복음주의도 후기복음주의도 세속주의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가장 충실하려는 지극히 복음주의적인 운동이라고 명명한다. 그리고 에큐메니칼이 에반젤리칼의 반대되는 말로 오해되는 이분법적 도식으로부터도 극복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교회의 하나됨과 교회의 교회됨을 이야기하면서 교회의 하나됨이 교회의 교회됨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마찬가지로 이제 우리가 에큐메니칼 지도력 양성을 논할 때 잊지 말아야 하는 명제는 '교회의 교회됨'이라는 명제가 될 것이고, 생명과 평화와 정의의 총체적 위기 앞에서 교회의 선교적 과제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인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헌신적으로 복무해야함은 그리스도인의 당연한 의무이자 정체성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

그럼 교회 연합운동의 백년대계라고 할 에큐메니칼 지도력을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우선 여성, 청년, 평신도의 참여를 권장하고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할 것이다. 남성 목회자 중심의 의견수렴 구조가 아니라 교회의 다양한 층으로부터의 의견수렴이 이루어지고 함께 결정하고 함께 실천하는 구조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지난 WCC 부산 총회에서 채택된 CWME 선교문서에서 이야기한 바대로 주변부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교회는 정의와 평화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로 2006년 제91차 총회에서 결정한 바대로 실행하는 일이다. 각 신학교마다 에큐메니칼 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채택하고, 총회 훈련원의 목회자 계속교육을 통해 에큐메니칼 목회의식을 심어주고, 평신도 계속교육에서 에큐메니칼 교육을 강화하는 일이다. 셋째로 지역교회 목회자들의 에큐메니칼 지역모임을 구성하고 전국적으로 확산한다. 이제 우리 시대는 똑똑한 개인보다 다양한 의견수렴 과정을 통한 공동체의 동력을 필요로 한다. 지역에서 그러한 공동체를 만들어주면 좋을 것이다. 넷째로 현재 생명과 정의와 평화를 위해 일하는 기관이나 단체의 사업비 지원과 실무자들에게 최저생계비를 지원하는 일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실현을 위해 현장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사람들을 사회선교사로 생각하고 지원하면 좋을 것이다. 총회에서 미처 관심가지지 못한 영역에서의 복음전파와 활동을 지원하고 새로운 영역으로의 사회선교사를 계속 파송하는 일이 해외선교사 파송만큼이나 중요한 복음전파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교회 연합운동의 백년대계에 대해 사실 우리는 이미 그 길을 알고 있고 총회에서 결정한 바도 있는데 제대로 실천하지 못했을 뿐이다. 이제라도 에큐메니칼 의식 확산과 지도력 양성을 위해 제대로 실천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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