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행동, 다른 출발

같은 행동, 다른 출발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

장순애 교수
2015년 01월 08일(목) 10:23

요즘 교회마다 품성교육이 한창이다. 대(對) 사회적 신뢰가 하락하는 기독교가 나름대로 내린 교육적 처방 중 하나가 아닐까? 좋은 품성은 분명히 교회교육이 추구해야 할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이다. 하지만 품성을 핵심주제로 강조하는 교회교육은 자칫하면 '하나님과의 관계'는 뒤로 밀려나고 인간적 품성만이 강조되는 왜곡된 신앙교육이 될 위험도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그런 교육을 하는 교회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학교의 시간은 언제나 불충분하다. 게다가 교회학교 교사인 우리들이 누군가. 기초와 원리보다는 결과를 선호하는 한국식 교육에 흠뻑 물든 우리들이 아닌가? 이런 우리가 짧은 시간에 강조하고 싶은 내용을 잘 가르치려 하다보면 '하나님 안'에서의 품성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즉 기초적 신앙은 '있다고 치고', 드러나야 할 결과인 품성만을 강조하게 될 확률이 높지는 않을까? 만일 그럴 경우 그것은 기독교 신앙교육이라기보다는 인본주의적 도덕교육에 가까울 것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창세기  13장은  내 머릿속에 "네가 좌(左)하면 내가 우(右)하고 네가 우(右)하면 나는 좌(左)하리라"는 요절로 남아있다. 그 결과 나는 아주 오랫동안 이 이야기를 '조카에게 대범하게 양보한 아브람은 더 큰 복을 받았고, 양보는 커녕 냉큼 나서서 이기적인 선택을 한 롯은 결국 유황불비가 쏟아지는 소돔성에 전 재산을 놔둔 채 몸만 가까스로 빠져나온'(창19장) 권선징악적 스토리로 품고 살았다.

이 본문은 교회학교에서 품성교육을 하기에 효과적인 본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양보하면서 살라'는 도덕적 교훈 자체를 위해 기록된 책이 아니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이야기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이 누구신가,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로 살기를 원하시는가를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알려주셨고, 알려주신다. 창세기13장 역시 그러하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단순히 양보하는 아브람과 양보하지 않은 롯의 이야기로 보는 대신에 그들의 삶의 결정적인 차이점이 무엇인가를 찾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한다. 사실 우리말 성경으로 보면 10~13절에 나타난 롯의 행동과 14~18절에서 아브람이 했을 것으로 여겨지는 행동은 대동소이하다. 둘다 눈을 들어(10, 14), 둘다 바라본다(10, 14). 롯은 택하고 옮기고(11), 아브람은 다녀보고 옮긴다(17, 18). 롯은 머물다가 또 옮기고, 이르렀다(12). 아브람도 옮기고, 이르렀고, 거주했다(18절).

그럼 롯과 아브람의 결정적인 차이는 무엇일까? 롯은 이 모든 행동의 주체가 오로지 자기 자신이다. 그러나 아브람은 롯과 '같은' 행동을 했으되, '하나님'의 명령 안에서 그 행동들을 받고 있으며(14-17), '하나님'이 하라하셨기에(18절) 그렇게 살았다. 그들의 결정적 차이점은 삶과 행동의 출발점이 '자신인가? 혹은 하나님인가?'였다. '롯이 떠날 때까지'(14) 침묵하시던 하나님은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져, 스스로 지혜있다 하는 이들을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롬1:21,22, 24,26,28)을 떠오르게 한다.

장순애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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