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입니까?

이스라엘입니까?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

장순애 교수
2014년 12월 16일(화) 15:46

올해 우리 학교 수시합격자들과 점심식사를 할 기회가 있었다. 대구나 부산 등 영남지역에서 온 학생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농어산촌 교회들에서 온 학생들도 꽤 있었다.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를 어떻게 알게 되었니?"라고 물었다. 농촌 출신의 학생이 대답했다. "우리 선생님이 말해주셨어요.", "교회 선생님?", "네", "그래? 교회에 중고등부가 있구나? 학생은 몇 명이야?", "네 명이요."

순간 가슴이 먹먹해지고 목이 메었다. '네 명. 어느 학년은 있고 어느 학년은 없기도 하겠구나. 그런데 그 선생님은 백퍼센트 다 나와도 네명뿐인 아이들을 포기하지 않고 매주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구나.' 교회학교 학생 중에서 학년별 수준 차가 가장 큰 곳이 중등부다. 그래서 중등부 사역이 심히 힘들다. 그런데 지금 이 학생이 '우리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그 분은 중학생 네 명도 아니고, 중고등부 전체가 네 명인 아이들을 묵묵히 신앙으로 길러냈구나 생각하니 부끄러움과 감동이 밀려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에서 '교사의 자격' 운운 하는 것은 아주 사치스런 말이 되고 말았다. 그저 누군가가 교사를 해준다면 그것만으로도 감지덕지 고마울 뿐이다. 그만큼 교회학교 교사는 3D 분야다. 그러나 교회학교의 성공 여부는 전적으로 교사에게 달렸다. 그 성공이 양적인 것이건, 질적인 것이건. 그렇다면 누가 교사를 해야하는가? 누가 교사를 할 수 있는가?

나는 그 답을 '쉐마 교육론'이라고 알려진 신명기 6장 4~9절의 첫 구절에서 찾는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등 기독교교육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알려진 그 구절, 그 구절의 맨 처음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따라서 이 명령은 '아무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다. 이 모든 교육적 명령은 오직 '이스라엘'에게만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교회학교 교사는 누구나 먼저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이스라엘입니까?'

이스라엘이 누구 혹은 무엇인지 알려면 그 이름이 처음 나온 창세기 32장으로 가야한다. 그 곳에는 평생을 발버둥치며 악착같이 살았던 한 사람, 그 결과 엄청난 성공을 한 인생이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성공에도 불구하고 그 밤에 그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 앞에 홀로 남았다. 그런 그에게 '어떤 사람'이 찾아온다.(24절) 그리고 밤새도록 씨름을 한다. 그는 그 분을 하나님(30절)이라고 말한다. 그 하나님께 그 사람이 고백했다. "나는 지금까지 야곱 스타일로 살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에게 새 이름을 주신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라는 이 이름에는 비밀이 있다. 씨름을 시작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이다.(24절) 아빠랑 어린 아들이랑 씨름을 한다. 누가 이길까? 아빠가 어린 아들에게 씨름을 건다. 왜일까? 아들에게 "니가 이겼다!"를 주기 위해서 울고 있는 아들에게 먼저 찾아오신 하나님의 은혜, 씨름을 시작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야곱을 '이스라엘' 되게 하였다.

누가 교회학교 교사를 할 것인가? 나를 먼저 찾아오셔서 나를 붙들고 씨름하시면서 내 스타일이 아니라 하나님 손에 붙들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이름,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우는 나, 그리고 당신이다.

장순애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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