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 마음에 원(願)이라면

진정 마음에 원(願)이라면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

장순애 교수
2014년 11월 10일(월) 16:28

"채원이가 왜 안보여요?" 작년 가을에 태어난 채원이, 본당 옆 아가방 유리창 너머로 방긋거리는 모습을 보이곤 했는데 몇 주 전부터 안 보인다. 채원이 할머니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순간 하이톤으로 날아드는 할머니의 대답. "고~게 글쎄 벌써 유치부에 가지 뭐예요. 호호호" 갓 돌이 지난 손녀가 유치부에 간다는 사실이 기특하고 자랑스러우신가보다. 손녀 이야기를 하는 내내 싱글벙글하신다.

어른예배를 마친 후 유치부에 들어서니 채원이 뿐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아기들이 제법 보인다. 그리고 아기들보다 아기를 데려온 아빠와 엄마의 숫자가 단연 많다.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 이유식을 준비하고 소독된 젖병과 기저귀를 챙기면서 분주하게 움직였을 귀한 사람들.

공관복음서에도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자기 어린 아기'를(눅18:15) 데리고 왔다고 하니 아마도 그 '사람들'은 그 아기들의 아빠와 엄마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나 지금이나 어린 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서서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 부모들은 '자기 어린아기'를 예수님께로 데려왔다. 왜였을까?

그 부모들은 자기들만 얼른 와서 예수님을 보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준비할 게 많고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더라도 자기 아기들을 데리고 예수님께로 왔다. 왔더라도 아기의 건강과 자신의 교양을 위해 먼 발치에서 조용히, 남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예수님을 보고 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제자들이 싫은 소리를 하는 데도 한발이라도 더 악착같이 예수님께로 다가서려고 했다. 왜였을까?

성경은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주심'을 바라고(막10:13, 눅18:15), '예수께서 안수하고 기도해주심'을 바라고(마19:13)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왔다고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어한다. 자기 마음에 '원(所願)'인 것을 자식이 성취할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해 헌신하는 것이 부모의 인지상정(人之常情) 아니겠는가? 꾸짖는 제자들의 눈총을 무릅쓰고라도 그들이  자기  자녀에게  주길  원했던 것은 예수님 '그 분'의 만져주심과 '그 분'의 축복하심이었던 것이다.

제법 쌀쌀해진 주일 아침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로 핑계치 아니하고 육신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깨어 기도하는 심정으로 커다란 가방을 들고 아기를 안고 영유아유치부 문을 들어서는 그 부모들의 간절한 그 '원'함이 아직 옹알이도 채 못하는 아이와 "예수님이 좋아요" "예수님, 사랑해요"를 나누는 그 부모들의 진실한 '원'함이 한국교회의 미래, 하나님 나라의 미래이다.

예수님 믿는 기쁨과 예수님 안의 영생, 예수님 믿는 복이 아기의 삶 속에도 전해지기를 진정으로 '원'하며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깨어 기도하는 걸음으로 아기를 안고 영유아유치부로 들어서는 이 땅의 모든 초보 엄마, 아빠들을 응원한다.

장순애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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