얘들아, 미안하다!

얘들아, 미안하다!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

장순애 교수
2014년 10월 28일(화) 15:42

화요일이다. 오늘의 기도제목은 태경이다. 우리 고등부의 미소천사 태경이가 미용대회에 나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태경이는 인문계 고등학교 2학년 여학생이다. 그러나 미용사인 엄마를 따라 장래희망을 미용사로 정했다. 대부분의 아이들은 중간고사, 기말고사에 스트레스를 받지만 태경이는 시험 전날도 쿨하다. 대신 자격증 시험을 보러갈 때, 그리고 오늘처럼 미용대회에 나갈 때, 혹은 원하는 만큼 미용기술이 늘지 않을 때는 스트레스 때문에 뾰루지가 쏘옥쏙 솟는 아이다.

교회 나온지 일년이 채 되지 않았고, 집안에서 혼자만 교회에 출석하는 태경이. 그 아이가 미용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뾰루지가 솟을 때마다 나는 손을 맞잡고 소리내어 기도한다. "하나님, 하나님이 사랑하는 우리 태경이, 하나님께서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시는 우리 태경이, 미용사의 꿈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이 꿈을 아름답게 펼칠 수 있도록 축복해 주세요. 오홀리압과 브살렐에게 하나님께서 주셨던 예술적이고 기술적인 그 총명함과 재주를 태경이에게도 충만하게 채워주세요. 늘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는, 하나님께 쓰임받는 미용사가 되게 해주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태경이뿐 아니라 우리 고등부에는 대학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삶을 꿈꾸는 아이들이 몇 명씩 있다. 물론 고등부의 절대다수는 일단은 대학을 향해 나아가는 아이들이다. 그리고 고등부의 교육흐름은 '소수'의 학생들보다는 '다수'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이뤄진다. 그런데 기독교교육의 출발점인 '예수님'의 교육도 그랬을까?

복음서를 볼 때마다 궁금했었다. 예수님 시대엔 장애인과 병자, 아픈 사람들 그리고 죄인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이 평범한 사람보다 그렇게나 많았던 것일까? 아니라면 왜 복음서는 예수께서 '절대다수'였을 평범한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보다는 약하고 아프고 가난하고 외로웠던 '소수'의 사람들을 만난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들려주는 것일까?

만약 오늘날의 기독교교육이 '예수님'을 본받는 교육이라면, 예수님의 시선이 더 자주 머물렀던 그 '소수'의 아픔과 약함과 외로움 쪽으로 우리의 시선도 좀 더 자주, 좀 더 깊이 돌려야하지 않을까? 또한 예수께서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함을,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려고 오셨고, 그렇게 사셨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라 사는 오늘의 한국교회는 대학을 향해 가는 '다수'의 입시생들과, 대학 대신에 다른 삶을 선택한 '소수'의 학생들, 양쪽 모두에게 '자유'보다는 '눌림과 포로됨'을 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회가 아이들을 하나님 안에서 자유로운 아이들로 날아오르도록 격려하는 기도회가 될 수는 없을까? 아이들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하게 되는 요즘, 아이들을 위해 기도하면서도 그 아이들에게 많이 미안하다. 대학입시의 막바지에 선 '다수'의 아이들에게도, 자신이 선택한 다른 삶을 위해 땀 흘리는 '소수'의 아이들에게도. "얘들아 미안하다. 너희들을 행복하게 못해 주어서…."

장순애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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