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아버지'의 하나님?

아직도 '아버지'의 하나님?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

장순애 교수
2014년 10월 14일(화) 16:33

올 여름 고등부 수련회 시작 날이었다. 참석여부가 반반이라, 기도하면서 애태웠는데 아이들이 속속 모여들자 '할렐루야 아멘'이 절로 나왔다. 그런데 모태교인에다 장로님 권사님 손주에 안수집사 아빠를 둔 1학년 아이가 안 보인다. 급하게 전화를 했는데, "공부캠프 왔어요, 수련회 못 가요." 그 순간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나중에 만난 그 아이 엄마가 울먹거리며 말했다. "이제까지 엄마 맘대로 했으니, 이젠 자기 맘대로 하겠대요. 죄송해요."

그날 이후로 고등부를 위한 기도 내용이 바뀌었다. "하나님, 이제 자기 맘대로 하고 싶다고 의견을 분명히 밝힐 만큼 우리 아이들이 많이 자랐습니다. 여기까지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는 우리 아이들이 엄마 맘대로가 아니라 자기 맘으로, 자기 믿음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오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게 해 주세요."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가로채는'(창27장) 이야기를 들을 때 마다 궁금한 게 있었다. 야곱은 왜, 어떻게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이면서' 축복을 가로채는 행동을 했을까? 물론 팥죽사건을 같이 연결해서 '그 복을 간절히 사모해서'였다고 들었다. 그러나 '장자의 축복'을 간절히 사모했다는 것이 '속이는 일'을 정당화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약속된 축복을 '인간의 방법'으로 성취하려했던 아브라함에게, "노(No)!"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창17:18,19) 하물며 아버지와 형을 속이고, 심지어 하나님마저도 속이면서(창27:20) 복을 가로채는 그 행동을 옳다 여기실까? 도대체 '저주받을 일'(12,13절)을 하면서, '하나님'의 이름까지 들먹이는 야곱의 이 엄청난 무모함은 어디서 나온 걸까?

20절엔 그 답이 숨어 있다. 야곱은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러기에 하나님 이름을 들먹이면서, 아버지의 질문에 냉큼 하나님의 이름을 써먹는다. 그러나 야곱은 그 하나님을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면서, 야곱 자신과는 직접 연결하지는 않는다. 그동안 야곱은 연거푸 우물을 빼앗겨도 아버지 이삭이 하나님께 복받는 것을 보면서 성장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똑똑히 보았고,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복과 연관시킬 줄도 알았다. 그러나 야곱에게 그분은 '아버지'의 하나님일 뿐, '나'의 하나님은 아직 아니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을 보았고 그 복을 사모했지만, 그 복을 주시는 '하나님' 자체를 사모하지는 않았던 야곱, 그는 자기가 사모하는 것을 차지하기 위해 '아버지'의 하나님 여호와도 슬쩍 들먹였던 것이다.

어쩌면 믿음의 가문에서 태어나고 믿음의 전통에서 꾸준히 성장해온 사춘기 아이들도 이와 비슷하다. 지금까지 교회에 다녔지만 아직 그들에게 하나님은 필요할 때 한번쯤 불러볼까싶은 아빠 엄마의 하나님? 그러니 이제, 혹시 아이가 갑자기 교회생활을 자기 맘대로 하고싶다 하면 당황하지 말고 아이를 위해 기도하는 교사와 부모가 되자. "지금까지 우리 아이를 키워주신 하나님, 이제는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자기 맘으로, 자기 믿음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아이가 되게 해주세요"라고.

장순애 교수 /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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