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어떻게 읽느냐?

네가 어떻게 읽느냐?

[ 기독교교육이야기 ] 기독교교육이야기

장순애 교수
2014년 09월 29일(월) 18:10

학교에서 '성서교수법'을 강의 중이다. 성경본문 한 개를 정해 2~4주씩 실습위주로 진행하는 수업이다. 지난 주부터 '사도행전 9장 1~19절'과 씨름 중이다. 일명 '사울의 회심'으로 잘 알려진 본문이다. 본문이 새롭게 바뀔 때마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라는 우리의 '매스터 티쳐(Master Teacher)'이신 예수님의 질문에 각자 답하는 것으로 우리의 수업이 시작된다.

그 중에서도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느냐?"를 찾는 작업은, 본문의 '모든' 문장을 '주어+술어'로 쪼개어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성경을 이렇게 자세히 읽고나면 대개 학생들은 깜짝 놀란다. 어제도 한 학생이 말했다. "어? 사울의 회심에는 사울만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니아도 있었네요! 엄청 많이 나와요!"

그렇다. '사울의 회심' 이야기에는 사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전체 19절의 이야기 중에서 사울이 아닌 아나니아가 주인공으로 나타난 곳은 여덟절이나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태교인으로서 이십 년 이상, 설교를 들어왔고, 성경공부를 해온 그 학생에게 아나니아는 왜 그렇게 낯설었던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그동안 우리가 성서를 '하나님의 이야기'로 읽지도, 가르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 본문을 '사울'의 이야기로 읽으면, 10~17절의 내용은 "어떤 사람이 와서 기도해줬어요"라는 한 마디로 끝난다. 그러나 그렇게 대충 지나갈 수 있는 '아나니아'가 왜 여기엔 여덟절이나 나타나고 있을까? 그뿐만이 아니다. 사도행전 22장 5~16절, 천부장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던 사울 자신도 '아니니아'를 네 절이나 할애해서 언급하고 있다. 왜 성령께서는 '아나니아'를 이렇게 많이 출연시키도록 감동을 주셨을까?

그것은 바로 이 사건이 '사울의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유대를 넘어 이방세계로 예수의 이름을 전할 그릇을 택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

일단 '예수님의 이야기'로 읽으면, 우리는 적어도 이 사건 안에서는 아나니아가 사울보다 예수님과 훨씬 더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사울은 영문도 모르고 사흘동안 암흑 속에 던져진 존재지만, 아나니아는 주(主) 예수께서 일을 맡기실 때 감히 반대의견도 낼 수 있는 관계였으니 말이다.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 아나니아는 아나니아대로, 사울은 사울대로 각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을 만나주시고, 그들의 주(主)가 되어주시며, 그들을 통해 '예수의 이름'을 더 널리 전하도록 하시는 '예수', 바로 그분이시다. 그리고 그 예수를 지금 우리가 주(主)로 믿고, 섬기고 있으니, 우리 역시도 그 '예수님의 이야기'속에 함께 있는 셈이다. "네가 어떻게 읽느냐?" 우리의 주(主) 예수께서는 오늘도 성경을 가르치는 우리들에게 물으신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우리의 기독교교육은 달라질 것이다. 

장순애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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