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에 다시 생각해 본다

6ㆍ25에 다시 생각해 본다

[ 기고 ] 함께생각하며

김명배
2014년 06월 17일(화) 13:58

 
6.25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두 가지 소중한 유산을 남겼다.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정신개혁과 국가안보의 기틀인 한미동맹이다. 수 천년 가난의 질곡을 숙명으로 체념한 채 '은자의 나라'(hermit country)로 살아 온 우리 민족이 6.25 전쟁을 통해 개방적, 진취적 개척정신이 투철한 미국적 민주주의를 체험하면서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헝그리 정신'을 바탕으로 경제발전에 총력을 기울이면서 '한강의 기적'을 이뤄냈다. 개전 초기 참전을 결정한 트루만 대통령의 영단이 없었더라면 한국은 1개월도 못 넘기고 공산화됐을 것이다.
 
당시 미국은 한국에 파병해야 할 조약상의 의무도 없었고, 한반도가 오늘날처럼 세계 정치, 경제, 군사의 중심으로서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북한의 재침을 막기 위해 한미동맹을 열망했던 한국의 국내여론과는 달리 미국의 국민여론은 "무엇때문에 우리의 소중한 아들들이 한반도에서 또 다시 피를 흘려야 하는가"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당시 공화당 후보인 아이젠하워의 대선공약이 '한국전 조기종전'이었고, 당선 직후 한국전선을 시찰하고, 휴전협정을 서둘러 체결할 정도로 국민의 반전여론이 거셌다. 한미동맹 체결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단독북진통일을 주장하고, 미국과 사전 협의 없이 2만3천명의 반공포로를 석방하고, 휴전협정 조인을 거부하는 등 초 강경 투쟁을 통해 미국을 압박해서 억지로 얻어낸 것이 한미동맹이었다. 실로 약소국의 처절한 생존전략이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이면에는 한미동맹을 바탕으로 한 미국민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음을 우리 국민이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한미동맹 체결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사람은 내심 재침을 기약했던 김일성이었을 것이다. '남조선 적화통일'의 꿈이 무산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었다.
 
김일성이 적화통일의 가능성을 되 찾게 된 계기가 4.19 학생의거였을 것이다. 학생시위로 대통령이 물러나고, 정권이 교체되는 사실을 목격하면서 반독재 민주화 학생운동을 주사파화 시키고, 한국사회에 좌경세력을 확대시키면 굳이 미군의 가공할 화력에 맞서는 무력사용이 아니더라도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적법절차인 선거를 통해서도 남조선 적화가 가능할 것이라는 나름대로의 판단 하에 61년 9월 당 대회에서 대남정치공작에 총력을 투입할 것을 지시한 바 있다. 87년 9월 전대협 결성을 계기로 학생운동이 변질되면서 장차 한국사회 정치권을 주도할 소위 386 급진 세력이 학생운동권을 장악하고 '반독재 민주화'를 구호로 '반미친북'투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처럼 한국사회 급진세력의 확대를 기도하는 북한의 정치공작이 이면에서 주도면밀히 작용하면서 한국사회가 변화해 갔다.
 
90년대 초 소련과 동구공산권 붕괴, 한ㆍ러 및 한ㆍ중수교, 김일성 사망, 식량난 등으로 급진세력이 일시 주춤했으나, 이후 6.15 공동선언, 여중생 사망 촛불시위와 탄핵역풍 등으로 한국사회는 17대 총선부터 극심한 이념 갈등 사회로 심화되어갔다. 정계는 물론 법조, 언론, 교육, 노조, 시민단체 등 한국사회 요로에 진보와 보수의 이념 갈등이 만연해 대한민국이 마비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북한은 이런 이념 갈등 속에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대남공작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다. 6ㆍ25를 맞으며 다시 한번 자유 민주주의 대한민국을 미래 후손들에게 물려 주어야 한다는 다짐을 해 본다.
 
우리와 항상 함께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 우리를 항상 도와주시는 '에벤에셀'의 하나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예비하시는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려 기도해야 할 절실한 이유이다. 

김명배(전 주 브라질 대사ㆍ예수소망교회)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