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죽을 때

지금은 죽을 때

[ 목양칼럼 ] 목양칼럼

김종익 목사
2014년 04월 02일(수) 17:26

부활절이 다가오고 있다. '살고 있다' 보면 '다시 사는 은혜'에 대해 둔감해지기가 쉽다. 그런데 이 부활의 은혜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수 있는 글을 보았다. 얼마 전 작고한 소설가 최인호의 '인생'이란 작품집에서 3만2천 년 전에 있었던 한 열매의 세포를 배양해서, 꽃 네 송이를 피웠다는 이야기를 읽은 것이다. 검색을 해보니 2년 전쯤에 기사화된 이야기였다.

러시아의 과학자들이 시베리아 콜리마 강 유역 지하 20∼40m 부근의 지층에서 축구공 크기의 땅굴 70여 개와 그 안에서 씨앗과 열매 60만 개를 발견했는데, 방사성동위원소 측정 결과 3만1800년 전의 것으로 추정됐다고 한다. 그 시절 땅다람쥐가 저장한 먹이였는데, 그 지역이 지각변동으로 지하 깊숙이 내려앉았고, 평균 영하 7도의 조건 속에서 씨앗과 열매들이 보존될 수 있었다는 얘기였다. 여러 차례의 실패 끝에 다시 꽃으로 피어난 생명체는 패랭이꽃과에 속하는 '실레네 스테노필라'라는 꽃이라고 한다. 그런 마음으로 봐서 그런지, 사진으로 보는 흰색 꽃은 참 예쁘고 신비로웠다.

한낱 들꽃의 생명력이 이와 같다니, 생명의 힘이 놀랍지 않은가. 하물며 하나님의 생명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까지 더하여 받은 우리들 인간이란 존재는, 또 얼마나 귀한가. 새삼 감사하면서 동시에 부끄러워진다. 우리의 경험과 상황이 좀 어려워졌다고 살 의지도 버리고, 살릴 희망도 저버리는 일이 다반사가 아니었나 하는 깨달음 때문이다.

한국교회의 형편을 보아도 그렇다. 기도하러 오는 사람이 없다고 심야기도회가 없어지고, 전도해도 열매가 없다고 전도 예산도 줄이고 있다. 교회가 성장하는 시절이 아니라고 개척하기를 꺼려한다. 그렇다고 다시 씨를 뿌리려는 선구적 노력이 드러나는 것 같지도 않다. 간혹 말과 글로는 다음세대를 걱정하며 미래세대와 미래교회를 위해 애써야 한다는 뜻을 접하지만, 수십 년 후의 선교적 기후를 바꾸고 영적 지도를 바꾸기 위해, 세간의 몰이해를 무릅쓰고 '새 땅 일구기'나 '나무 심기'에 모든 걸 바치고 있다는 식의 얘기는 들어보기 힘들다. (글쓴이의 과문(寡聞)일 수도 있다.) 우리 세대가 져야 할 십자가는 그런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새 예배당 건축이나 감투나누기식의 연합사업이 아니고.

봄노회 기간이다. 누가 총대를 나가야 하는 지보다 더 중요한 일을 논의하고 기도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십자가 길을 말씀하시려는 주님 앞에서 '누가 크냐'며 갈등했던 제자들이, 마치 내 모습 같아서 편치 않을 때가 많지 않던가.

어쨌든 우리는 지금 죽을 궁리보다 살 궁리를 하고, 경쟁하여 이길 궁리보다 사랑하여 다 같이 살 궁리를 해야 할 때이다. 그러려면 아이러니한 말이지만 '제대로 죽을 궁리'부터 해야 할 것이다. "한 알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어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다"(요12:24)는 말씀을 순종적으로 묵상해야 할 것이다.

죄를 이기는, 죽음보다 더 강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신 주님을 바라보자. 3만2천 년의 세월과 동토를 견뎌내고도 다시 사는 게 주님이 주신 생명력이란 걸 기억하자. 첫 부활의 열매이시고 부활의 능력이신 우리 주님을 믿고, 기꺼이 내가 죽어 다시 살뿐 아니라 살리는 생명력으로 거듭나는 비전을 품자. 그게 부활의 주님을 믿고 부활을 기념하는 교회다움이며 성도다움 아닐까. 아무쪼록 살아있는 기쁨과 살리는 희망을 노래하는 부활절이 되기를 기대하며 기도한다.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그리고 그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살 것이다."(요 5:25-26)

김종익 / 목사 ㆍ 염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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