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읽은 소명

거꾸로 읽은 소명

[ 목양칼럼 ] 목양칼럼

김인주 목사
2014년 02월 14일(금) 09:55

집을 나선 어르신은 돌아오지 못하고 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건강하다 하더라도 겨울 날씨에 밖에서 오랜 시간 견디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살아 계시리라는 희망은 줄어든 채, 시신이라도 어서 눈에 띄기를 기다리던 가족들은 이쯤에서 사태가 마무리 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 여길 만했다. 아니면, 부질없는 수색의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상황이었다.

자녀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둔 게 아니어서, 자녀들은 못내 안타깝고 죄송스러워 했다. 경황 중에도 장례절차는 원만하게 진행되어 갔다. 가족 중에 신자들은 두어명 밖에 없다. 어느 종교의식에 매이지 않는 전통적인 지역의 장례의 예대로 묻히게 되었다.

고인의 며느리인 권사님은, 몇 명의 교우들이 장지를 찾은 것이 고마우면서도 미안스러운지, 기도순서를 마련하겠다고 하였다. 못마땅하더라도 설마 반대야 하겠느냐는 계산이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만류하였다. 역으로 생각하면, 교회의 예식에 따라서 진행되는 장례식에 다른 신앙이나 문화의 장례절차가 수용되지 못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설득하였다.

어디서 발견되기를 기다리며 애타게 찾던 때에, 교우들도 적극적으로 도우며 나섰다. 그러나 지나친 점들이 결국 후유증으로 남게 되었다. 몇몇 여신도들은 권사님이 해결하여야 할 죄가 있어서 시아버지의 실종이라는 벌을 받은 것이므로 회개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나 보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수색작업에 진력하기에 앞서서 먼저 무릎 꿇고 기도하는 게 먼저라고 강변하게 되었다. 욥을 찾아온 친구들처럼 판단한 것이다. 공교롭게도 그 숫자도 세 명 정도가 되었다.

인과응보 원칙에 따라 상벌이 정확하게 맞아 들어가는 세상은 아니지 않는가? 난감했던 욥의 고민이 한층 더 이해될만 했다. 다른 사람을 향한 회개의 촉구는 매우 조심스러워야 한다. 자신을 향한 자성과는 달리, 어려운 상황에 빠진 사람에게 회개를 강요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까? 너무나도 일방적인 생각이었다.

돕는다는 생각으로 이러저러한 제보가 있었지만, 도움은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잘못된 정보를 바탕으로 엉뚱한 곳에서 찾느라고 많은 시간이 흘러가버린 셈이다. 예언의 은사를 받았다는 다른 교회의 사역자는, 누군가가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며, 어느 날을 지정해서 돌아올 것이라고 짚어내기도 하였다. 결국 허망한 추측으로 끝났으니, 신명기 18장에 따라 거짓예언자일 수밖에 없다.

어려운 때에도 침묵하며 방관한 목회자가 되었으니, 부족함을 다시 느끼게 된다.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은사도 없이, 자리나 지키고 있는 자신이 원망스럽다. 하지만, 이게 본래 내가 원했던 길이 아닌가 생각하면 누구를 탓할 것도 없다. 무능하다고도 보이는 평범한 사람들의 길에서 이웃이나 벗이 되는 목회를 하고 싶다고 일찍이 마음을 정했다.

일찍 글을 깨친 탓에, 어린 시절 여러 사람들에게 주목의 대상이 되었다. 어려웠던 시절, 목회자와 교우들의 갈등은 자주 불거졌고, 유일한 해결책을 목회자 교체에서 찾았다. 여집사님 몇 분이, 다른 교회의 어려운 상황을 두고서 말을 나누다가, 한 분이 나를 돌아보더니 말하였다. "는 컹, 교역잔 되지 말라". 너는 나중에 커서 어려운 목회자의 길을 걷지 말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에게는 훌륭한 목사가 돼라는 격려와 축복보다도 오히려 더 강한 부름의 음성으로 들렸다.

김인주 목사 / 봉성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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