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이 땅의 '하나님 나라' 책무 다하라

교회, 이 땅의 '하나님 나라' 책무 다하라

[ NGO칼럼 ] NGO칼럼

김철호 목사
2013년 12월 27일(금) 16:01

IMF 외환위기 이후, 국내외 투기금융자본들이 대부분의 금융기관들을 사유화 했다. 신자유주의 시장경쟁체제의 핵심권력인 투기금융자본들이 우리사회의 독점 지배 권력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로 인해 은행 등 금융기관들의 영업행태도 공공(公共)과 공익(公益)을 저버린 채 사익만을 추구하게 되었다. 기업대출에는 눈을 감고 주택담보대출 등 가계대출에만 목을 매고 있다. 한 마디로 서민들의 잠자리와 하루벌이 품삯을 빚 담보로 틀어쥐고, 고리채 놀음을 벌여, 서민들의 호주머니를 털어가기에 바쁘다.
 
그렇다면 투기금융자본들은 왜, 서민생활경제기반에 기를 쓰고 달려들고 있을까? 서민들의 생활경제기반에 개입해서 가계대출을 늘리는 것이 기업대출에 비해 많은 이윤을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정부도 신용카드 사용 장려, 부동산 및 금융시장부양 등 투기금융자본들의 이윤증대를 위한 경제정책들을 남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투기금융자본에게 점령당한 한국금융기관들의 대출관리능력은 빵점에 가깝다. 대출자들의 현재와 미래의 자산ㆍ소득상황을 파악하고 대출위험 요소가 무엇인지 예측하는 것은 금융기관의 영업능력이다. 나아가 대출을 해주거나 거절하는 것도 전적으로 금융기관들의 판단과 책임이다. 따라서 신자유주의 금융자본경제에서는 기업이 빚을 내고 빚을 갚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러 파산을 신청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것은 서민들의 생활경제활동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독점자본주의 시장경쟁체제에서 가난한 서민들은 개인 생활경제위기와 그로인한 역경을 버텨내기가 매우 힘들다. 쌓은 것이 별로 없는 개인 생활경제상황에서, 오늘날처럼 투기금융자본들이 조장하는 사회ㆍ경제위기를 만나면 속절없이 파탄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가난한 서민들의 과중채무는 도덕적인 문제이거나 개인 차원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리어 사회적 책임의 문제이다. 약탈적 대출의 덫에 걸려 절망과 죽음의 나락에서 허덕이는 가난한 이들에게, 공ㆍ사법권을 등에 업고 가혹한 빚독촉 해대는 투기금융자본들의 행태야말로 진짜 반사회적이고 비도덕적이다.
 
이점에서, 우리사회의 400여 만 금융피해자들은 투기금융자본들로부터 강도를 당한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는 강도당한 이들의 처지를 이해하거나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도리어 도덕적해이자라고, 시장경쟁체제의 낙오자이며 실패자라고 정죄한다. 투기금융자본들로부터 강도당한 이들을 우리사회의 걸림돌이며 암초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러한 행태는, 우리사회가 철저하게 맘몬(자본)세상의 가치기준과 편견으로 이들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회는 우리사회에 만연한 맘몬숭배와 맘몬세상의 가치기준과 편견에 저항해야 한다. 교회는 마땅히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들인 400여 만 금융피해자들을 향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역할을 자임하고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교회가 "하나님과 맘몬을 함께 섬기지 못한다"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고 있음에 대한 가장 명확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맘몬(자본)세상에서 교회의 선한 사마리아인 역할을 위한 신앙의 태도는 무엇일까?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긴다. 강도 만난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것은 예수 신앙 실천의 출발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회개의 은사이며, 이 땅의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고 살아내야만 하는 교회의 마땅한 신앙태도이다. 왜냐하면 우리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들인 400만 금융피해자들의 절망과 고통이 우리시대의 죄악의 실체를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 자신의 삶과 사회공동체의 부조리를 깨닫게 해주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는,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신앙의 눈으로 400만 금융피해자들을 바라 보아야한 한다. 교회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과 절망을 헤아릴 수 있어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을 쫓아 우리시대의 강도 만난 사람들인 400만 금융피해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치료해 주어야 한다. 나아가 교회는 그들의 상처를 싸매고 치료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의 상황에 간섭하고 참여하는 공동체 관계를 맺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의 마땅한 역할과 책무가 있기 때문이다.

김철호 목사 / 민생네트워크새벽 상담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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