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과 인권

기독교인과 인권

[ NGO칼럼 ] NGO칼럼

이계윤 목사
2013년 06월 26일(수) 10:10

인권(Human Rights)은 오늘의 화두이다. 인권은 사람이 사람으로서 가진 권리를 말한다. 인간존엄(人間尊嚴)은 인권존중(人權尊重)으로부터 시작된다. 인권이 침해받는 곳에 인간존엄은 존재하지 않는다.
과연 어제까지 전개된 기독교 역사와 앞으로 전개될 미래의 역사, 그리고 오늘 우리가 존재하는 기독교 현장에 인권존중(人權尊重)은 어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가? 가톨릭과 기독교가 지배했던 유럽의 긴 역사와 미국 역사 속에서 우리는 모순된 현실을 볼 수 있다. 
 
성경에서도 사람을 셀 때 '성인 남자'만을 중심으로 하였다. 게다가 '나면서부터 앞으로 보지 못하는 사람'을 죄의 결과로 간주하는 데에는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았다. 요사에 성공주의 혹은 긍정의 힘에 사로잡힌 목회자들은 '병과 가난은 죄의 결과'라고 당당하게 설교한다. 이러한 무지함에 대하여 '아멘!'으로 화답하는 맹목적 신앙은 무기력한 교회의 모습을 단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과연 장애의 90%가 후천적인 요인이요, 질병 역시 산업화로 인하여 소진(消盡)할 수 밖에 없는 근로현장과 오염된 공기로 인하여 얻어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개인적인 잘못으로 연결할 수 있을까? 그러면 예수님을 믿지 않고 게다가 불법(법을 교묘히 이용하면서 얻은) 재산과 성공은 '의의 상징'인가? 예수님은 '그리스도인의 모임'을 교회라고 하였건만, 여전히 예배당 건물을 '교회'라고 일컫고, 사람들의 손으로 지은 집을 싫어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한 채, '대형 성전건축'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강요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무 거리낌 없이 교회를 '자녀'에게 세습하는 '도둑질'에 대하여 아무 말 하지 않는 현실은 무엇인가?
 
예수님은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무엇보다 사람의 의중(意中)을 존중히 여기셨다. 지극히 작은 자 중의 하나와 예수님 자신을 동일시하시되 당시 유대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하지 않던"사마리아 사람, 윤락녀 마리아, 세리 마태, 한센인, 장애인, 가난한 사람, 그리고 어린아이 등"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 한 사람을 존중하고, 그들의 아픔을 함께 하시고, 사랑으로 만나주셨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그들의 집에서 '식탁을 함께 하는'일에 적극적이셨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인권 존중'의 본보기이다.
 
교회를 찾는 사람들, 하나님의 사랑을 갈구하는 사람들 뿐 아니라 교회 바깥에 살고 있는(최근에는 예배당에는 가지 않지만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무엇일까? 바로 사람을 하나님처럼 높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인격적으로 대하듯이 서로 존중하는 것이 아닐까?
 
안타까운 것은 '도가니'사건에서 보듯이, 인권이 침해당하는 부끄러운 사건에서 보듯이 긍정적이지 않은 사건의 배후에는 기독교인이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학교, 복지시설 등에서 나타나는 비인간적인 행태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 모습들이다. 이러한 모든 불행한 일들에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은 비록 그가 죄인이지만,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아들을 십자가에 죽이기까지 사랑하셨건만, 이러한 사랑을 알고 있다는 기독교인에 의해서 인간의 존엄이 무시되고, 인권이 침해되고 있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이계윤 목사(전국장애아동보육제공기관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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