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교회는 예수님이 허문 담을 다시 쌓으려고 할까?

왜 교회는 예수님이 허문 담을 다시 쌓으려고 할까?

[ NGO칼럼 ] NGO칼럼

이계윤 목사
2013년 05월 27일(월) 09:56

'예수님은 막힌 담(barrier)을 허셨다(엡2:14). 하나님과 사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쌓여졌던 담을 허셨다.'
 
이는 선언적인 표현인가? 아니면 실질적인 표현인가? 담(barrier)이란 관계를 가로 막는 일종의 벽(壁)이요 장애물(障碍物)이다. 이는 사람을 하나되지 못하게 하고 나뉘게 한다. 마치 남과 북 사이에 있는 휴전선, 비무장지대(休戰線, 非武裝地帶)와 같다. 겉으로는 싸움을 그치고, 싸움을 위한 어떠한 무장도 하지 않는 구역이 가운데 놓여져 있지만, 이로 인하여 남과 북은 오고가지 못하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가 바로 그 상태이다.
 
예수님은 전 세계가 하나가 되기를 원하신다. 적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뉨(Separation, Division)'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Sharing, Reconciliation)'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과연 교회 안에는 나뉨이 없고 나눔만 존재하는가? 이러한 질문에 그렇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러나 이것이 지향점이요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라는 점에서 부인할 사람도 없을 것이다.
 
성경에서는 세 종류의 나뉨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성전 미문에서 구걸하는 장애인의 모습(행 3:1~10)은 성전 안과 성전 밖으로 나뉨이다. 그에게 몇 푼의 동전을 던져줄 지언정, 함께 성전 안으로 들어가자고 내미는 손이 없다. 둘째는 성전 안에서의 나뉨이다. 18년간 귀신들려 허리를 펴지 못하는 여인(눅 13:10~17)은 성전 안에 있지만, 성전 안에 있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지 않다. 셋째는 지역사회 내에서의 나뉨이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있는 장애인들(요 5:1~18)은 가족, 이웃, 그리고 지역사회 주민으로부터 소외된 지역에 거주함으로 더불어사는 공동체와 무관하다.
 
이러한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과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예배당입구와 강대상에 있는 계단과 장애인이 접근을 가로 막는 장애물(barrier)로 인하여 장애인들은 예배당 바깥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예배당 안에 있어도 소위 '장애인만을 위한 예배'나 예배당 내의 편의시설 부족, 그리고 직제에 있어서 장애인이 설 자리가 없기에 또 다른 분리를 경험한다. 그 중에 "나는 외모를 보지 않고 중심으로 본다!"는 하나님의 관점을 찾아보기 어렵다. 여전히 장애를 겪는 목회자는 장애인 교회, 장애인 부서 등에 머물러 있을 뿐 담임목회자로 청빙 받는 일은 용이하지 않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지역사회 내에서 장애인들은 소위 시설(Institution, 施設)이란 이름 하에서 지역사회와 분리된 공간(space)에서 거주한다. 이러한 시설을 운영하는 주체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 혹은 기독교 재단이다. 즉 시설에서 집단(集團)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규칙과 프로그램을 따라야 하고, 이로 인하여 자기결정(Self-Determination)을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인권(人權)존중의 사각지대에 놓여져 있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법적으로 인가를 받지 못한 채(소위 未認可施設) 장애인을 보호하는 사람들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다. 이들은 종종 종교기관(기독교)과 보호시설(사회복지)라는 이중의 관점으로 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다는 운영자의 입장에서 자기주장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바로 이는 30여 년 전 어느 책에서 유명해진 질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도 유효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예배당의 현실, 목회자의 목회철학, 다수결원리에 근거한 교회 의사결정 구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예수님의 정신이다.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는 일 자체가 영적인 사역이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일이다. 담을 허신 예수님 앞에서 다시 담을 쌓아가는 일은 중지되어야 한다. 평화이신 예수님이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자를 세우셨다. 그것이 교회이다. 교회가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진정한 하나됨'을 위하여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는 것이다.

이계윤 목사(전국장애아동보육제공기관협의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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