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인 삶의 황금률, '… 남에게 대접하라'

기독교인 삶의 황금률, '… 남에게 대접하라'

[ NGO칼럼 ] NGO칼럼

박성용 목사
2013년 04월 24일(수) 09:29

진리와 은총의 실재를 이 세상의 삶에서 성육화하는 것은 성육신을 믿는 기독교인의 최고의 가치이자 존재 이유이다. 이를 위해 예수께서는 당시의 유대랍비 전통의 '원치않는 것은 남에게 하지말라'고 가르치셨다. '대접받기를 원하는 대로 남에게 대접하라'가 그것이다. 이것이 혁명적인 사고를 요청하는 이유는 내 행동의 근거로서 상대방의 존중어린 태도, 마땅한 행동, 윤리적 선함을 전제하지 않고 오직 내안에 행동의 근거를 두고 상대방에게 행동하기 때문이다. 상대방이 그럴 만 하니까 잘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남으로부터 기대하니까 내가 남에게 행한다는 것은 상대가 원인이고 내 행동이 그 결과로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초대는 내 안의 진정성에 대한 기대가 내가 남에게 행하는 행동의 원인이고 내 행동이 따라서 결과로 표현된다는 놀라운 의식의 변혁을 요청하고 있다. 비폭력실천가로서 나는 이 황금률의 요청에 다음과 같은 신비로운 삶의 작동원리가 숨어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우리의 삶에서는 끌어들임의 법칙이 작용한다"
 
실재는 연결되어 있고 우리의 영혼은 나누지 못하는 온전성(wholeness)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나의 사랑, 공감, 자비 그리고 신뢰는 타자와 우주의 사랑, 공감, 자비, 그리고 신뢰를 끌어들인다. 반면에 나의 분노, 파괴적인 에너지 그리고 분리감은 상대방과 우주의 그와 같은 에너지를 끌어들인다. 왜냐하면 생명계는 상호소통의 열린 개방시스템이고, 물리적 현상과 정서적 현상 그리고 우리의 영적 현상은 생명으로서 동일한 법칙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주는 것은 받는 것이다"
 
물리적 세계에서 나의 것을 준다는 것은 남에게 건너간다는 뜻으로 더 이상 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혼의 세계에서는 나의 것을 준다는 것은 상대방에게 가버린 것이 아니라 내게 돌아온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준 것만이 나의 것이 된다. 상대방의 고통, 갈등, 손상에 대한 개입이나 경청에 관여할 때, 이것은 외면적으로는 나의 에너지, 시간, 노력의 소모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진정 그런 상황에 개입하여 온전히 알아차림과 현존함으로 있을 때 많은 경우 뜻밖에도 지침과 소모로서가 아니라 나에게 에너지의 충전, 의미의 부여받음, 삶에 대한 통찰을 얻으면서 더 큰 자아에 대한 감각, 세상 안에서 세상을 넘는 그 무엇에 대한 직관을 얻게 된다. 영혼 안에서 주는 것은 언제나 받는다. 그리고 주는 만큼 자신이 성장한다.
 
셋째, "삶의 기반은 은총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낮과 밤의 하나님, 햇빛과 비를 골고루 주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한다함은 영혼에서 낮과 햇빛만이 아니라 밤과 비도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길이라는 궁극 체험을 지칭하는 것이다. 추락, 어둠, 낙담, 분리, 손상, 폭력의 현장에서 '수고로움'은 그 자체가 신께로 가는 거룩한 길이요, 따라서 에너지 소모의 경험이 아니라 오히려 타자-남-상대로부터 '대접'을 받는 차원으로 내가 선물을 받게 되는 경험이 일어나게 된다. 이것은 사전에 기대하지 못한 뜻밖에 출현되는 존귀한 그 무엇(something)이 되는 것이다.
 
우주 안에서 존재하는 것들은 그 무엇도 사소한 것이 없다. 살아있는 생명계는 엔트로피 법칙(에너지가 소모되어 더 이상 움직임이 없이 굳어져 버리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비폭력 실천가로서 남을 온전히 공감과 현존으로 대접하고 있을 때, 인간성이 파괴된 그 격렬한 분쟁과 증오감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그 무엇이 출현된다. 감추어진 보편적 인간성에 대한 신뢰가 나타난다. 적대감을 내려놓고 서로의 진심을 진정으로 들으며, 미래를 향한 새로운 선택을 하게 되는 전환이 일어나게 된다.
 
이를 통해 진행자는 자신의 줌이 '대접받음'으로 돌려받게 된다. 에너지가 충전되고 삶의 의미가 충일된다. 왜냐하면 은총이 우리 존재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사랑받는 존재를 사랑하는 '사랑하는 공동체'의 일부이고 모든 존재가 또한 그러하다. 주는 것은 '일'이 아닌 '기도'가 되고 거룩한 분의 현존을 돌려받게 된다. 하나로 일치시키는 하나님의 현존 안에서 주는 것과 받는 것 대접하기와 대접받기는 하나로 흐른다.

박성용 목사/비폭력평화물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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