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줌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기

고통을 줌으로 변화될 수 있다는 환상에서 깨어나기

[ NGO칼럼 ] NGO칼럼

박성용 목사
2013년 03월 27일(수) 14:36

갈등중재의 활동을 하면서 최근에 한 학교에서 일어난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초등시절에 절친하게 지냈고 학생 엄마들도 서로 잘 알고 있는 두 중학생이 심한 장난 끝에 한 애가 턱뼈가 부러져서 학교폭력위원회에까지 올라갈 사건이 되었다. 피해자는 상대방 학생이 심했지만 어렸을 때부터 친한 친구여서 상대방의 처벌을 원치 않았으나 학교측에서는 그 정도가 심하고, 아무런 조처가 없으면 학생들에게 경고가 될 수 없어서 학폭위를 열어 강력한 처벌을 원하는 학교와 원치 않는 양쪽 학부모와 갈등이 생긴 묘한 사건이었다.
 
가해자 학생이 심한 장난을 해서 손상은 일어났지만 그렇다고 당사자들만 아니라 부모까지 친한 학생을 치료외에 그 어떤 엄한 처벌을 원치 않은 당사자 학생들 부모와 학교폭력에 대한 엄중한 조처와 그 대응을 통해 다른 학생들에게 학교의 권위와 질서를 보여주려는 입장사이에 심각한 갈등이 있어 문의를 해 온 것이었다. 친한 친구들이 학폭위에서 가해자와 피해자로 재판에 내세워져야 하는 묘한 상황이 된 것이었다. 여기서 딜레마는 친구간의 우정을 존중하는 방식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학칙위반에 대한 법의 무서움을 더 중시해서 그 애와 부모들의 관계가 어찌되었든 법의 권위를 세울 것인가의 문제이다.
 
대구여중생자살사건부터 최근의 경산고교생자살사건에 이르기까지 학교폭력에 대한 대응은 일종의 엄벌주의를 바탕으로 CCTV 증설, 학교에서 경찰의 진입과 신고의무 강화, 가해자에 대한 피해보상 요구강화 등으로 강력한 응보형 대처로 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폭력의 현상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고비용 저효율의 응보형 패러다임이 사회적 안전망을 형성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문제인 것인가?
 
상대방의 행동이 변화되길 원한다면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동기가 되어 상대방이 변화되길 원하는가? 강제력, 도덕적 수치심, 두려움인가 아니면 이해, 존중, 협력, 자기책임에 의해서인가? '고통을 부과하는 것이 효과가 있다'는 이 오래된 검증되지 않은 신화에 대해 우리가 깨어나지 않는 한 학교폭력문제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행동은 우리 의식의 표현이듯이 학교폭력은 우리 가슴에 있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함을 알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일산 고양의 한 중학교에서 친구간에 폭력문제를 회복적 서클의 방식으로 당사자들간에 대화를 통해 해결한 사건이 있었다. 가해자 A군은 두어 차례 작은 다른 사건에도 그후 연루되어 회복적 서클의 당사자대화모임에 나타났었다고 전해들었는데 금년 2월 학생자치임원들을 위한 평화리더십에 그가 있었다. 학교에서 골치덩이였던 그가 학교의 인내와 당사자 대화모임을 통해 놀라운 변화를 보인 것이다. 만일 다른 학교의 경우였다면 그는 이미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가서 적응하지 못하고 결국은 일년에 7만명이 중퇴하는 거리의 청소년중 하나로 될 수 있었을 것이다.
 
폭력을 비난, 두려움, 수치심 그리고 고통의 부과의 방식으로 온전히 해결한 사례가 없다. 일어난 것에 대한 이해와 그 의미 확인, 대화와 공동체의 협력이란 방식을 당사자들과 공동체 구성원들이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상호이해와 자기책임을 확인할 때 변화는 일어난다. 깨어진 관계 회복을 통해 폭력은 현저히 줄어드는 것이다. 이 고양에 있는 중학교에서는 작년 14건의 학교폭력사건이 이렇게 당사자들의 직접대화를 통해 13건이 만족한 해결로 종료되었다. 해외에서든 국내에서든 87~93%가 당사자들의 만족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두려움의 힘이 아니라 이해의 힘이, 강제하는 힘이 아니라 관계하는 힘이 이토록 믿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은 원래 형제였던 남북간의 첨예화된 위협의 군사대결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분단후 60년 동안 교육이나 남북대결에서 되풀이 써먹고도 제대로 작동 안된 '강제의 신화'에 대해 깨어날 때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제정신이 아님(insanity)을 정의하기를 "똑같은 것을 계속해서 되풀이 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는 제정신이 아닌 사회관행에 대해 새로운 것을 모색할 때이다. 그토록 우리의 절망이 너무 깊지 아니한가?

박성용 목사/비폭력평화물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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