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큐메니칼이 에반젤리칼의 반대라고?

에큐메니칼이 에반젤리칼의 반대라고?

[ NGO칼럼 ] 에큐메니칼 칼럼

장윤재 교수
2013년 03월 14일(목) 11:22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철학자 하이데거는 간파했다. 따라서 잘못된 집을 지으면 언어가 우리를 속인다. WCC를 무턱대고 반대하는 것에도 잘못된 언어의 유희가 있다. WCC를 이끌어 가는 '에큐메니칼'이 '에반젤리칼'과 반대말인 양 착각하는 것이다.
 
'에큐메니칼'(ecumenical)이라는 말은 신약성서에 모두 15번 사용된 그리스어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한 말로, 그것은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를 뜻한다. 내 마을, 내 교파, 내 나라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 즉 지구 전체를 사고의 지평으로 삼으니 그것은 태생적으로 포용적이고 탈(脫)경계적이다.
 
이러한 '에큐메니칼'의 반대말은 '에반젤리컬'이 아니라 '섹테리안'(sectarian), 즉 '분파주의', 혹은 '당파주의'이다. 분파주의 혹은 당파주의란 자신의 특정한 신앙체험이나 진리에 대한 이해가 마치 보편적이고 절대적이며 최고의 것인 양 주장하는 태도를 말한다. 자기와 생각이 다르면 무조건 배타하는 근본주의적 신앙의 가장 큰 특징이 바로 이 분파주의 혹은 당파주의다. 그래서 에큐메니칼 시각이 결여된 교회는 복음을 협소하게 해석하여 편협한 공동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는 정확히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2장에서 말한 성령의 다양한 은사를 긍정하는 태도와 대비되는 자세다.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고전 12:4-11)고 말한다. 사도 바울이 한 성령을 강조하면서도 얼마나 다양한 은사를 따뜻한 눈으로 긍정하는지 보라.
 
분파주의는 신앙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의, 거룩한, 보편적, 사도적 교회'를 추구하지도 않는다. 단지 복음을 '사유화'해서 자신이 유일한 진리의 담보자인 것처럼 행세한다. 이와 달리 에큐메니칼은 각 교파 신앙고백(confession)의 부분성을 인정하고 세계적 지평에서 그리스도를 통한 연합을 이루어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고전 12:25) 하려는 정신이자 문화이고 또한 운동인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자기 초월, 자기 비움의 신앙적 결단이다.
 
바로 이러한 '에큐메니칼'은 철저한 '에반젤리칼'이다. '에반젤리칼'(evangelical)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evangelion)을 최고의 가치로 놓고 그것에 온전히 헌신하는 신앙적 태도를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선포하신 그의 사명선언문(mission statement)에 잘 나타나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여기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들, 즉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전파하며,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그리고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는 것들이 바로 '복음의 이상들'(evangelical ideals)이고, 이것이 바로 에큐메니컬 운동이 이제가지 헌신해온 최우선의 가치다.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그 누구보다도 에큐메니컬 운동이 바로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적 이상의 구현을 위해 앞장 서 왔음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태 7:20)고 말씀하셨다. 에큐메니컬은 '탈복음주의'도, '후기 복음주의'도, 혹은 '세속주의'도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온전히 헌신하려는 지극히 복음주의적인 운동이다. 에큐메니칼을 에반젤리칼에 반대되는 말로 사용하는 이분법적 도식부터 극복해야 한다. 그래야 이 땅, '사람이 살고 있는 온 누리'를 하나님의 우주적 사랑으로 다 품을 수 있는 에큐메니칼 문화와 정신이 꽃필 수 있다. 이 봄, 한국교회에 그런 에큐메니칼 봄이 오길 기도해본다.

장윤재 교수 / 이화여대 기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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