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구원론적인 의미, 피아니스트

예술의 구원론적인 의미, 피아니스트

[ 말씀&MOVIE ] 영화-피아니스트

최성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2월 17일(월) 14:00
[말씀&MOVIE]

피아니스트(로만 폴란스키, 드라마, 12세, 2002)
 
도스토예프스키는 '백치'에 등장하는 미쉬낀의 입을 통해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는 말을 반복한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내면의 아름다움 곧, 무정형의 아름다움을 일컫는다. 소설에 등장하는 나스타시야는 외적인 아름다움의 전형을 표현하고, 미쉬낀은 내면의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백치'에서 두 개의 아름다움을 대비시키면서 도스토예프스키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내면의 아름다움이 갖는 가치다. 특히 내면의 아름다움이 선한 정신을 만날 때 비로소 구원의 빛이 발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 세계에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정신적인 것이다. 아름다움이 단순한 매혹의 차원에서 벗어나 윤리적인 의미를 갖게 만들어 주는 것도 바로 정신적인 것이다. 그렇다고 외면적인 아름다움이 무의미하다거나 무가치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선과 악의 경계선에 서 있으며, 오직 선한 정신과 만날 때 비로소 진정한 구원의 힘을 발하는 것이다.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었지만 198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F. 내쉬의 감동적인 실화를 그린 '뷰티플 마인드' 역시 진리를 추구하는 선한 정신의 가치를 보여준 영화였다. 선한 정신이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는 내쉬를 구원해내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보는 이에게 많은 감동을 준 영화다. 과연 예술이 선한 정신과 만날 때 구원의 빛을 발할 수 있는가? 신학적 미학은 선한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의미하는 한 그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겨울 풍경을 추억할 만한 영화를 찾다가 2002년에 개봉되어 칸과 아카데미에서 감독상과 주연상 그리고 작품상을 받은 '피아니스트'를 떠올리게 되었다. 영화 포스터에서도 볼 수 있지만, 황폐한 도시가 하얗게 눈으로 덮힌 모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장면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피아니스트'는 폴란드가 자랑하는 피아니스트이며 대표적인 쇼팽 연주가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동명의 자서전을 원작으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이 만든 작품이다. 홀로코스트 영화로서 '피아니스트'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인들의 끔찍한 만행 가운데 스필만이 어떻게 생존할 수 있었는지를 사실적으로 재현한다. 중심 내용은 나찌의 만행을 폭로하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비극의 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스필만의 생존 이야기이다. 스필만은 홀로코스트로 가는 열차에 승차하기 직전에 유명 피아니스트인 그를 알아본 폴란드 군인의 도움으로 탈출하게 되고, 게토에서 탈출하여 피신하는 동안 황달과 영양실조로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서도 순간순간마다 찾아온 사람들의 도움으로 생존할 수 있었다. 게다가 퇴각하는 도중에 있던 독일군 장교와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 스필만은 오히려 그의 도움을 받으며 그 추운 겨울에서도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던 주요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가 유명한 피아니스트였다는 사실이었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은 홀로코스트 영화나 한 유명 피아니스트의 단순한 생존 수기로 마칠 수 있었던 이야기를 매우 색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내었다. 나찌의 아우슈비츠 만행에 분노하는 일부 영화인들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쉰들러 리스트'에서 영화 말미에 선한 독일인의 모습을 등장시킨 것에 대해 깊은 유감을 표현했듯이, '피아니스트'를 홀로코스트의 참상과 나찌의 만행을 폭로하는 데에 가치를 두고 영화를 본 사람들은 아마도 크게 실망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홀로코스트 장면을 과감하게 생략했던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폴란스키 감독의 주된 의도는 다른 데에 있었음에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그는 혼란과 절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술의 가치와 의미, 그리고 한층 더 나아가서 예술(아름다움)이 한 생명을 어떻게 구원해내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을 영화 안에 담아낸 것이다. 생애 마지막 연주가 될 수도 있었던 독일군 장교 앞에서 이뤄진 스필만의 연주는 단순히 악보상의 리듬을 건반으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내면의 아름다움을 재현해 내는 일종의 종교적인 행위와 같은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더 이상의 희망을 가질 수도 없는 절대절명의 순간에 독일 장교로부터 연주하도록 명령을 받았을 때, 스필만은 단순히 쇼팽의 곡을 연주한 것이 아니라 쇼팽의 곡을 연주를 매개로 내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아름다움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의 연주를 듣는 동안 독일 장교는 무엇을 보고 또 느꼈을까? 내심 궁금하지만 독일 장교가 그의 생존을 도왔던 데에서 그의 감동을 충분히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도운 이유는 단순히 나중에 자신이 위기에 처할 때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줄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나 쇼팽의 아름다운 음악 때문이 아니었다. 분명 주변의 상황이나 자신의 처지에 아랑곳 하지 않고 예술의 세계에 몰입하며 아름다움을 길어내는 스필만의 선한 정신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21세기는 예술의 시대다. 예술을 통해 소통하고 예술의 가치가 존중되는 시대를 말한다. 경기가 어려워지고 경제적인 상황이 어려워진다고 해서 예술과 예술가를 존중히 여기는 사회를 포기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왜냐하면 혼란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예술은 하나님이 말씀대로 되는 세상을 만드셨음을 증거 하는 또 하나의 방편이기 때문이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한 정신으로 삼는다면, 예술은 아름다움을 매개로 충분히 세상을 구원할 것이기 때문이다.
 
최성수목사 / 神博ㆍ영화 및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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