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 스타일

광해 스타일

[ NGO칼럼 ] 광해 스타일

박현석사무총장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1월 02일(금) 15:30
[NGO칼럼]

요즘 나라 안팎은 '강남스타일'이라는 노래와 독특한 말춤으로 세계 음악계에 새로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싸이라는 가수와 이 시대의 지존이 되겠다는 세 분의 대통령 후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데 영화계에도 작은 파장이 일어나고 있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감독 추창민)가 개봉 사극 영화로는 관객 동원에서 최고 기록이라고 한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대략 이렇다. "숨겨야 할 일들은 기록에 남기지 말라"(光海 100卷 8年 2月 28日)라는 비사(秘史)를 영화로 각색했다. 광해가 왕으로 재임하던 15년 중, 15일간의 행적은 조선왕조실록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부친 선조가 늙어 인목대비에게 새 장가들어 낳은 영창군과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혼란이 극에 달한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자들에 대한 분노와 두려움으로 점점 난폭해져 가던 왕 '광해'는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위협에 노출될 대역을 찾을 것을 지시한다. 하선은 왕과 똑같은 외모는 물론, 타고난 재주와 말솜씨로 왕의 흉내도 완벽하게 대역을 해낸다.
 
"백성들은 임금을 지아비라고 하는데 빼앗고 훔치고 빌러 먹을지언정, 나는 내 백성을 살려야겠소. 그대들이 죽고 못사는 사대의 예보다 내 나라 백성들의 목숨이 열 곱절 백 곱절 더 소중하기 때문이오"- 광해(하선)역의 대사 중
 
이같이 광해(하선)는 궁 내 가장 아랫사람들의 안위까지 두루 살피고, 백성 스스로 노비가 되고 기생이 될 수밖에 없는 현세를 개탄한다. 결국 그는 민생을 염려하는 전에 없던 성군이었고, 조선이 꿈꿔온 왕이 되어 버렸다.
 
광해는 애초 왕이 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첩의 몸에서 태어났고, 그것도 맏이가 아닌 둘째였기 때문이다. 특별히 부친 선조에게 총애받지도 못했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시대와 상황이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고 결국 17년이라는 인고 끝에 권좌에 오른다. 선조는 전쟁이 무서워서 백성들과의 신의와 약속을 져버리고, 의주로 피신하면서도 '명'으로 귀순하려고 했다. 그러나 광해는 왕세자가 된 후, 전쟁터의 백성들과 함께 하면서 전쟁을 지휘하며 앞장섰다. 왜란을 겪은 후 민생과 나라 기반을 재건코자 '대동법'을 실시하고, '동의보감'도 반포한다.
 
또한 그는 명과 청의 교체시기에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했다. 즉 명에게는 기본적인 예의를 취하되, 후금은 오랑캐지만 다독거려 전쟁을 막는 이원적인 외교전략으로 맞선다. 광해만큼 주변 열강의 동향을 살피고, 그 정보 분석을 통해 국제정세 변화에 기민하게 대처한 군주는 일찍이 없었다. 결국 "모친을 폐하고 동생을 죽인 패륜아", "명의 은혜를 배반한 시대의 폭군" 등을 명분삼아 1623년 인조반정으로 조선 15대 왕 '광해'는 결말이 난다.
 
임진왜란, 인조반정, 병자호란으로 점철된 17세기 초반, 외세의 영향력과 내부 권력투쟁으로 비겁한 삶을 살아온 그들 사고와 모습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되었다. 지금 한반도 주변은 새로운 냉전시대로 회귀했다. 영토분쟁과 패권주의! 주변의 강대국인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그 누구도 우리 민족의 염원인 통일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염려해주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 내부에서 퍼지고 있는 남남갈등을 민족 화해와 통일이라는 대승적인 사고 전환으로 극복해야 하고,  또 밖으로는 주변 4강과의 타협과 협조로 자립할 수 있는 외교적인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세치의 혀'로 거란의 대군을 물리치고, 강동 6주를 얻었던 이 시대의 '서희'와 전쟁의 위기 속에서 이원적인 외교로 대처했던 이 시대 '광해'가 절실하다. 결국 우리는 세 명의 대권 후보 중에서 누가 더 하늘과 백성을 진심으로 두려워 하고 아파하는지, 그리고 누가 민족과 통일에 대한 철학과 비전을 품은 지도자인지 잘 뽑고 선택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몫이 되었다.

박현석 / (재)새누리좋은사람들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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