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중동전쟁

제2차 중동전쟁

[ 이강근의 중동이야기 ] 제2차 중동전쟁

이강근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0월 30일(화) 14:31

[이강근의 중동이야기]

제2차 중동전쟁은 수에즈운하를 둘러싸고 이집트와 영국-프랑스-이스라엘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이 전쟁을 수에즈전쟁이라고도 부르는 것은 수에즈운하를 놓고 벌인 전쟁이기 때문이다. 정작 수에즈운하를 점령한 것은 영국-프랑스였고, 전쟁의 당사자였던 이스라엘이 공격목표로 한 것은 시내반도의 가자, 알아리쉬, 아부 우와율라, 샬롬 엘 세이크였다. 이들 4개 목표물은 이스라엘의 안전에 치명적인 이집트의 군사기지들이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의 개입으로 이스라엘-아랍 간의 제2차 중동전쟁으로 불리는 것이다.

그럼 왜 이스라엘은 이집트 선재공격에 가담했는가? 가자에 주둔한 이집트군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소모전이 계속되었었고, 이스라엘의 남단 에일랏으로 들어가는 홍해입구인 티란해협을 폐쇄했던 것이 안 그래도 이집트에 대한 공격의 빌미를 찾고 있던 이스라엘에게 기회가 됐다. 울고 싶던 차에 때려줬다는 표현이 가장 적절하다. 영국-프랑스는 이스라엘을 설득해 먼저 이집트를 공격해주기만 한다면 바로 영국-프랑스가 뒤이어 수에즈운하를 공격한다는 비밀협약도 맺었다.

그럼 영국-프랑스는 왜 이집트를 공격해야만 했을까? 이집트 영토 내에 건설된 수에즈운하는 프랑스와 이집트가 공동 출자로 1869년에 최초로 개통해 이집트의 '수에즈운하회사'가 운영했다. 개통 후 영국은 프랑스와 손을 잡고 이집트 소유분의 주식을 매입해 사실상 수에즈운하의 운영권을 장악했다. 당시 영국은 자신들의 식민지인 인도와 북아프리카와 중동, 더 나아가 호주 및 뉴질랜드까지 이어지는 해상교역의 중요한 전략적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수에즈운하의 중요성은 열강들에게는 절대적이었다. 수에즈운하는 지중해와 인도양을 연결하는 세계최대의 해상운하로 유럽 열강들에게는 자국의 경제와 안보을 확보하기 위한 각축장이었다. 당시 유럽에 수송되는 2/3의 석유가 이 수에즈운하를 통했고, 아시아 및 태평양을 유럽과 연결시키는 국제해상의 비단길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집트의 나세르가 이 수에즈운하의 국유화를 선언한 것이었다.

나세르가 국유화를 선언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집트는 아스완 댐 건설사업을 결정하고 미국과 서유럽의 재정지원을 약속 받았다. 이어 군대 강화를 위해 소련에 접근해 무기구입 계약을 체결했다. 미국은 소련를 견제하기 위해 이집트 아스완댐 건설을 위한 차관을 취소케 하였다. 아스완댐 건설에 재정적인 타격을 받은 나세르는 곧바로 수에즈운하를 국유화 해 여기서 나오는 수입으로 아스완댐을 건설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여기에 가장 반발한 나라가 영국과 프랑스였다. 그리고 전쟁 명문을 위해 이스라엘로 하여금 전쟁을 시작하게 했고, 뒤이어 자신들이 수에즈운하를 점령한 것이었다.

전쟁 발발 직후 미국은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을 전방위적으로 압박해 정전과 휴전을 요구했다. 미국은 동맹국의 이집트 공격으로 헝가리에서 벌어진 소련의 무자비한 유혈진압을 비난할 명분을 잃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기 이집트 전쟁이 자칫 중동전쟁으로 확전될 우려를 하기도 했다. 소련도 영국-프랑스의 군사개입을 강력 비난하며 중동 평화를 위해 중동 개입에 대한 명분을 갖게 되었다.

결국 영국-프랑스-이스라엘은 휴전협정에 서명하고 철군했다. 전쟁에서는 엄청난 승리를 거두었지만 국제정치의 역학관계에서는 외교적인 실패를 가져왔다. 반면 이집트 나세르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아랍세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었고 이는 곧 3차 중동전쟁으로 이어지는 아랍의 힘을 모으는 계기가 됐다. 제2차 중동전쟁을 기점으로 중동 무대에서 주연을 맡아왔던 영국과 프랑스는 역사의 뒤안 길로 물러났다. 대신 미국과 소련이 중동문제에 전면적으로 나서는 발판이 마련됐다.


이강근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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