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목과 생존

거목과 생존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거목과 생존

김권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0월 26일(금) 13:44

[젊은이를 위한 팡세]

별 볼 일 없는 씨로 시작
새들의 보금자리 거목으로 성장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 과소평가,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

말씀 성취 위해 '생존'이 먼저

우람한 나무의 나이테를 소재로 하고 있는 작품들을 보고 즐길 때가 있다. 나이테를 보면 남과 북의 방향과 더불어 나무의 역사도 특히 생존의 이력도 알 수 있다. 나이테가 촘촘하다는 것은 그 나무가 생존하기에 바빠서 얼마동안은 외적인 성장을 할 수 없었다는 증거이다. 물론 어려운 시절에 생존했기에 성장할 기회도 맞이할 수 있었다. 큰 나무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씨앗으로 힘겹게 뿌리를 내려야 했고 성장과정에는 가뭄이나 혹한 등 악조건 속에서도 살아남았기에, 새들의 보금자리가 되고 남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미래를 경험할 수 있었다. 생존은 미래의 문턱을 넘어서는 그 무엇이다.

거목인생들도 거저 된 것이 아니고 적자생존의 치열한 세상을 살면서 들러리 인생일 때도 있었고, 삭막한 인심을 뼈저리게 느끼며 움츠렸던 적도 있었으며, 수고하고 땀 흘린 것의 결과가 시원치 않아 휘청거릴 때도 있었지만, 끝까지 살아남았기에 공동체의 그늘과 버팀목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자크 아탈리가 '살아남기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지금 현재는 개인적으로 성취한 것이 없을 지라도 끝까지 살아남는 자만이 미래를 차지한다"고 피력하나 견해는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동량지재들 역시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 연유로 '생존력'은 '미덕'이라 말할 수 있다. 아기 예수님께서 애굽으로 피신하신 것을 보라! 그 분은 본질상 하나님이면서도 인간의 옷을 입었을 때는 때론 생존하기 위해 피신하셨다. 다윗은 청소년 때부터 자신보다 덩치가 큰 맹수와 싸웠던 간 큰 남자다. 골리앗을 물리친 구국의 영웅이요, 승승장구했던 전쟁영웅이다. 그런 다윗이었지만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침을 흘리고 미친척하면서 살아남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적이 있었다. 전쟁영웅답지 못하다는 오해를 받을지언정 살아남은 일을 우습게 알지 않는 겸허한 지혜가 있었다.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치는 모습을 과소평가하는 젊은이는 어리석고 교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가르침도 있다. 그렇다면 생존과 순교의 정당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무엇인가가 관건이다. 예수님은 때론 피신하셨고 때론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자원하셨다. 그 기준이 약속의 성취여부였다. 순교의 모습일지라도 말씀 성취와 관련되어 정당성을 부여받지 못한다면 순교가 아니듯이, 말씀성취라는 명분이 있을 때만이 생존을 위한 피신이 정당화된다.

약속이 성취되면 젊은이들이 호령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생존을 전제로 성장했을 때의 일이다. 생존이란 참으로 소중하다. 머리가 좋고 재능이 출중하고 사회에 공헌할 인품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생존에너지에 문제가 생기면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된다. 그래서 흔히들 'revival'하려다가 'survival'도 못한다고 말한다. 'revival'이 'survival' 보다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있어서 '생존'이 먼저라는 말이다. 다만 말씀 성취를 위한 생존이어야 겨자씨 비유의 그 거목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다.


김권수목사

카드 뉴스
많이 보는 기사
오늘의 가정예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