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풍노도

질풍노도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질풍노도

김권수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10월 19일(금) 10:00

[젊은이를 위한 팡세]

 이성과 감성의 선택
 역사주관자 주님의
 가르침이 근거

 "일상생활의 결정권 마져,
 주님께 내드리는 삶돼야"

요즘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지구촌 일부를 강타하고 있다. 미국의 대선 후보들조차 그 영향을 인지하고선 대선 홍보에 활용할 정도이다. 싸이 열풍은 가히 지구촌에 몰아닥친 질풍노도이다. 프리드리히 폰 클링거가 희곡 작품명으로 사용했고, 괴테 등이 주도하면서 자리매김한 질풍노도운동(Sturm und Drang)은 냉철한 분석을 강조하는 합리성보다는 예리한 직관을 무기로 삼는 감성을 추종한다. 질풍노도는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주관적인 감성을 앞세우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데, 싸이의 '강남스타일'은 바로 이 직관적인 감성으로 읽히고 표현되는 곡이며 그런 점에서 질풍노도의 21세기적 모델 중 하나로 소개될 수 있다.
 
예수님시대 사람들이 무리들과의 소통에 실패해서 울 줄도, 춤출 줄도 모르는 메마른 감성을 질타하였음을 생각할 때 우리 기독청년들은 싸이의 열풍을 보고 감성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물론 이성과 감성을 분리시켜 인간을 보려는 오류는 피해야 한다. 소통을 중시하는 감성적 리더십에서 이성 역할을 축으로 하듯이, 인간은 실존적으로 이성과 감성이 상호작용하는 존재다. 루소는 이성의 기치를 내걸고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제공했으면서도 동시에 낭만주의자로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외치면서 이성의 감옥에서 벗어나야 함을 주장했는데, 이러한 이성과 감성의 상호작용을 먼저 전제하는 것이 인간의 올바로 조명이다.
 
성경은 합리적 이성과 직관적 감성이 물과 기름의 관계가 아닌 동전의 양면과 같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해도 예수님이 나를 위해 하늘영광보좌 버리시고 십자가까지 대신 지셨음을 이성으로 알고, 그런 희생적 사랑을 생각하면서 감성이 작용하여 눈물까지 흘리면서 감격하면서 날 대속하신 그 주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하겠다는 결단을 동반한 행동이 뒤따르는 의지 곧 지정의가 조화를 이룬 신앙이어야 인격적 신앙이라고 하지 않는가? 이런 신앙이라면 그 어떤 유형의 질풍노도도 'O.K' 이다.
 
이성강조의 계몽주의 열풍도 2% 부족함을 드러냈고 직관적 감성의 질풍노도 운동도 칸트의 활약으로 이성에 밀리는 양상을 보였다고 평가하 듯 결국 제기되어야 하는 본질적인 질문은 이성과 감성의 복합체인 인간이 언제 이성 혹은 감성에게 운전대를 맡길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경우에 합당하게 선택을 해야 하는데 그 근거는 역사주관자 주님의 가르침이다.
 
자신과 관련해서는 이성을 그러나 이웃의 아픔과 관련해서는 감성을 우선시 하는 것이 원칙이다. 마치 물이 없는 광야에서 사흘이나 헤맸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라 연못을 보았을 때 감성에 순종해서 급히 물을 먹기보다는 인도하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이성을 먼저 강조했어야 했듯이, 한편 재해를 만난 지구촌의 형제들을 볼 때는 이리저리 따지는 이성보다는 그들의 아픔에 동참하는 감성이 앞서야 하듯이 말이다. 기독교인에게는 이성과 감성의 행사라는 일상생활의 결정권마저도 주님에게 내어드리는 삶 곧 인생운전대를 전적으로 맡기는 삶이 요청된다.

김권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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