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하지 않는 사회, 애통하지 않는 교회

애도하지 않는 사회, 애통하지 않는 교회

[ 논단 ] 자살과 교회

김은혜교수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6월 25일(월) 11:36

주간논단

또 아이가 죽었다. 대구에서 고등학생이 자살을 했다. 지난 6개월 동안 대구에서만 10명이 자살투신시도가 있었고 결국 8명이 숨졌다. 학교폭력,가정불화,성적비관,어린 자녀들이 감당할 수 없어서 생명을 포기해야만 했던 모든 원인들은 사회와 가족공동체에 있다. 우리의 자녀들이 죽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낼 때에도 자신의 고통을 사랑하는 가족,친구들에게도 말하지 못했으며 학교도 사회도 이들을 지키지 못했다. 사람은 누구나 고귀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대통령의 죽음만 애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의 죽음에 대한 애도는 인간만이 가질 수 있는 생명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이다.
 
지난해 대구 중학생의 유서를 적신 눈물이 채 마르기 전에 또 다시 금쪽같은 우리 새끼들이 죽어간다. 교육청이나 학교나 어린 생명들의 자살 행렬 앞에 책임지는 곳은 없고 말만 무성하다. 얼마나 더 죽어나가야 이 사회는 애도할까? 지난해 4명의 학생과 1명의 교수가 잇달아 자살해 파문이 일었던 한국과학기술원(kaist) 비극이 악몽같이 또 재현되었다. 최고에 대학에서 가장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고 있는 이 학생의 고민은 진로에 대한 불안이다. 자신이 늘 거닐던 교정에서 죽었다. 불안을 강화하고 두려움을 생산하는 사회이다. 우리는 이들이 죽음으로 절규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사회를 향해 하고 싶은 말을 들을 여유가 없다. 온 사회가 진심으로 애도하지 않고서는 들을 수 없는 깊은 상처의 울부짖음이기 때문이다.
 
너무 쉽게 잊혀지는 슬픔에 가슴이 메인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이 반복되는 사회가 우려스럽다. 내 자신이 아닌 것이 다행이고 남 자식 생각할 겨를 없이 매정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충분히 애도하지 않은 슬픔은 남겨진 자들에게 더 큰 슬픔이다. 슬픔의 빠른 극복은 미덕이 아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은 죽음이 많을수록 충분한 애도가 없는 죽음이 반복될수록 사회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어떻게 죽임을 멈추게 할 것인가? 죽음을 애도하지 않고 애써 외면하려는 공동체는 이 행렬을 멈추게 할 수 없다. 교회가 이러한 죽음의 행진 앞에 부끄러워할 줄 모르고 노여워할 줄도 모르고 분노하지 않으며 애써 잊으려한다면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공범이다. 그 책임으로부터 한국교회는 자유로울 수 없다. 천하보다 귀한 자식들이 울부짖는 절규에 예민해져야한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생명을 살리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서에 웃으셨다는 기사는 없지만 세 번 우신 본문이 나온다. 마르다와 마리아의 슬픔에 통분이 여기시고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비통해하신 이유는 슬픔에 대한 공감이고 시대에 대한 통분이다. 예수님의 슬픔은 인간의 고통과 죽음 앞에 방관하고 신적인 이적만을 베푸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슬픔에 철저한 공감이며 죽음을 아파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려낸다. 로마서 12장 15절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신다. 시대의 아픔과 이웃의 슬픔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애통하는 심령을 회복해한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하는 기도가 우리 아이들을, 무너져가는 가정을, 비틀거리는 한국교회를 살릴 수 있는 힘이다. 충분히 애도하지 않는 공동체는 동일한 슬픔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 공동체의 내적 각성은 죽음에 대한 진정한 애도를 진심으로 공유할 때 가능해진다. 사회가 충분히 애도해야 한다. 죽은 아이의 부모의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비통해 해야 한다.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잃은 슬픔에 애통하지 못하는 교회는 이미 사랑의 능력을 잃은 것이다.

김은혜 교수 / 장신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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