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노래

4월의 노래

[ 논단 ]

고무송목사 webmaster@pckworld.com
2012년 04월 03일(화) 11:09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
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

 
박목월 작시 김순애 작곡 '4월의 노래'를 다시 불러본다. 조건반사처럼, 아니 연례행사처럼 4월이오면 부르게 되는, 봄만 돌아오면 도지게 되는 고질병(痼疾病) 같은 것이다. 단기4293년, 빛바랜 일기장을 들춰내는 것처럼 말이다.

4월19일(맑음)
 
(전략) 그래도 강의는 계속되었다. 동서문화교류사(東西文化交流史)가 첫시간부터 연속 세시간이다. 둘째 시간도 무사히 마쳤다. 셋째 시간이 절반쯤 지났을까, 드르륵 문이 열리더니만- "운영회 결의입니다. 데모에 나오십시오!" 예기했던 바 그대로 올 것이 왔다. "와아!" 모두가 일어서서 함성과 함께 책을 걷어치우고 우루루 몰려나갔다. 교수의 만류도 들을 여유가 없다. 쿵쾅거리는 발자국, 이리 뛰고 저리 뛰는 구둣발소리, 학교는 장날인양 법석이다. 우리는 연구실에 모였다. 시종 동일행동을 취하기로 했다. "정부는 마산사건에 책임을 지라!"는 구호를 외치기로 했다. 

 
그렇게 4ㆍ19혁명은 시작됐다. 그때 우리 학교는 동대문밖 용두동에 있었다. 스크럼을 짜고 종로를 거쳐 광화문을 지나 경무대 앞으로 진출했다. 서울은 데모대로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경무대 앞 효자동 전차 종점에 이르렀을 때, 경찰의 데모대를 향한 정조준 집중사격이 시작됐다. 쓰러지는 학생들의 피는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필자는 현장에서 붙들려, 체포된 학생들과 함께 경복궁에 수용됐다가, 한 밤중 군용트럭에 실려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졌다. 서울은 온통 불바다였다. 동대문경찰서와 서울신문사가 불에 탔다. 시민들이 환호하며 데모에 합류했다. 아, 그날의 그 함성이여! 그날 우리는 어쩌자고 '4월의 노래'를 불렀던고. 자못 서정적인 애창 가곡임에도 구호처럼 외쳐댔던 것이다, 목이 터져라.
 
돌아온 4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
 
빛나는 꿈의 계절아 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다시 4월이 돌아왔다. 그날 함께 '4월의 노래'를 불러댔던 그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얼하고 있는 것일까? 더러는 총선출마 후보자 명단에 얼굴을 내보이기도 한다. '4ㆍ19혁명투사'라는 타이틀이 전가지보(傳家之寶)처럼 등장하는 대목이다. 여간 명이 긴 친구들이 아닐 수 없다. 마치 평균수명이 길어졌다는 구실로 정년을 연장해야 된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빌어 읊조렸던 이현보(1467-1555)의 효빈가(效嚬歌)를 권한다. 그가 70세에 관직을 은퇴, 낙향하며 읊은 시조 한 수.

 귀거래(歸去來) 귀거래(歸去來) 말뿐이오 간 이 없네
 전원(田園)이 장무(將蕪)*하니 아니 가고 어찌할꼬
 초당에 청풍명월(淸風明月)이 나며 들며 기다린다

*장무(將蕪): 장차 황폐해 짐.


고무송 목사 / 전 기독공보사장ㆍ한국교회인물연구소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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