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다원주의자 - 다윈주의

사회적 다원주의자 - 다윈주의

[ 창조과학칼럼 ]

이재만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8월 31일(수) 14:36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출판되면서 진화론은 단지 과학에만 국한된 주제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과거에 진화가 일어났다고 믿는다면, 그 사람은 진화 역사의 연장선을 통해서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시각에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진화론의 믿음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고 적용하려는 시도를 '사회적 진화론' 또는 '사회적 다윈주의(Social Darwinism)'라고 한다. 앞으로 수 회에 걸쳐 진화론의 영향을 받아 각 전문분야에 영향을 주었던 사회적 다윈주의의 대표주자들을 다뤄보려고 한다. 이들 모두가 당시 신 학문의 리더라고 호평을 받았기 때문에 많은 현대인들이 그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다룰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사회적 다윈주의자를 언급하기 전에 다윈이 생각했던 '다윈주의(Darwinism)'를 먼저 정의하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다윈이 주장했던 것처럼 한 문장으로 보면 "오늘날의 생물들은 생존경쟁에 이긴 것이 자연선택에 의해 살아남은 것이다"이다. 나중에 이를 허버트 스펜서가 "적자 생존(survival of the fittest, 1864)"이라는 용어로 함축시켰다. 그러므로 진화론을 믿는 사람들은 이 개념을 동물뿐 아니라, 인간에게도 적용시키려고 했으면, 그 결과 사회적 다윈주의가 탄생한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다윈주의는 서구가 갖고 있던 기존의 생각들을 모두 거꾸로 만들어버렸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가치기준을 성경에 두고 있던 당시 서구의 생각과 절대적으로 반대였기 때문이다. 다윈주의는 사회구조와 역사가 인격적인 하나님이 아닌, 비인격적인 세력에 의해 지배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진화론을 받아들인 서구의 정치가, 교육자, 사업가들은 빠르게 세속화되어 무신론이 증가하는데 일조했다. 결국 성경은 최종적 권위를 잃게 되어 서구 사회는 절대적 기준의 상실과 함께 윤리가 바닥으로 떨어져갔다.

다윈주의는 미래는 진화의 순서대로 개선되는 방향으로 갈 것이라는 기대를 주었다. 진화와 진보를 함께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진보할 수 있다는 생각을 주기 때문에, 본인들은 경쟁에 이겨야 한다는 부담을 더욱 받게 되었다. 더군다나 인간은 하나의 고등동물에 불과하다는 다윈주의는 주위의 이웃도 경쟁의 대상으로 바라보며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동물처럼 취급하는 것을 합당화시켜 버렸다. 반면에 성경은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라"(마 20:26)고 하였으며, 동물들은 인간이 다스릴 대상이며,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라고 말한다.

또한 다윈주의는 모든 것을 물질로부터 왔다고 말하기 때문에 생각, 영혼 등도 물질의 상호작용에 의해 비롯되었다고 여기게 만들었다. 이는 곧바로 유물론이다. 유물론은 곧 무신론이다. 왜냐하면 물질의 창조이전부터 계셨던 '영'이신 하나님과, 창조 이래 지금까지 역사를 주관하셨던 창조자를 부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앞으로 독자들이 진화론의 과학적 문제점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진행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 열매로 나무를 아느니라"(마 12:33)는 말씀대로 대표적인 사회적 다윈주의자들의 열매를 보면서도 진화론의 부당함을 자연스럽게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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