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노이아 (μετανοια) 마지막 이야기

메타노이아 (μετανοια) 마지막 이야기

[ 젊은이를 위한 팡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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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06월 16일(목) 10:30

지난 일곱 번째 이야기에서 나는 유대인이 전통적으로 공의로운 하나님을 강조하는 것과는 달리 예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설파한다 하였다.

더 나아가 "적까지도 사랑하고", "오른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는 예수님의 이 같은 가르침들은 아름답고 심오한 영적 혁명이며, 결국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대변되는 유대인 정서와의 급진적인 결별을 선언한다.

성경을 통람해볼 때, 예수께서는 이방인 백부장을 이스라엘 가운데 볼 수 없었던 위대한 믿음으로 칭송하기도 하셨고,(마8:5-13) '수로보니게' 여인의 믿음에 감복한 나머지 그녀의 딸을 고쳐주셨으며,(막7:24~30) 사마리아 여인을 만났고,(요4장) 그보다 더 금기시된 나병 환자들과의 접촉을 꺼리지 않으셨다.(막1:40-45: 눅17:11-19) 더 나아가 선인과 악인을 초월하여 햇빛을 비추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차별 없이 비를 내리시는 하늘 아버지(마5:45)의 자녀가 되는 방법으로 '하나님 닮기'의 길을 상정하기도 하셨다.

이처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자, 율법의 모든 것이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을 때 율법이 필요하다.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우리 모두는 하나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것을 깨친 사람이 단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도행전 13장 1절을 보면 당시 가장 모범적인 교회를 이끌었던 안디옥 교회의 다섯 지도자 이야기가 나온다. 첫째, 정통 유대인의 레위 집안 출신의 바나바, 둘째, 흑인인 시므온(니게르), 셋째, 지금으로 본다면 리비아에서 온 먼 이방사람인 루기오, 넷째, 매국노 가족의 일종인 헤롯 가문의 마나엔,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의 박해자인 사울이다.

그런데, 이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도저히 교회의 지도자라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은 출신성분이 매우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한데 어울려 하나의 공동체이자 보편적인 교회를 이룰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오직 '주님만이 교회의 주인이시라'는 하나 된 믿음으로 신분을 타파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사랑은 좋아하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은 우리가 이웃을 좋아하든 싫어하든 그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 세리들도 이같이 하질 않느냐"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의 의미는 어떤 '태도'를 의미하는 것이지 '감정'을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사랑이란 본래 이웃에 대한 관심이며 밖으로 뻗어 나가는 것이지 자기중심적이거나 선택적인 태도가 아님을 독자들은 명심하길 바란다.

아울러 지난번에 필자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 제거해야 할 요소로 불교의 삼독(욕심, 화냄, 무지) 이야기를 원용(援用)한 바 있다.

신약성경 골로새서에서도 우상숭배는 단순히 만들어진 상을 숭배하는 것뿐만 아니라 마음에 일어나는 부정, 잘못된 욕망, 탐욕 등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메타노이아'를 통하여 편견으로 똘똘 뭉친 우리들 각자 마음의 우상을 깨부수지 않으면 참 하나님, 참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자기를 부정함으로써 자아에서 해방되기를 가르치는 '메타노이아'는 옆에서 보면 고난의 길, 바보의 길로 보이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자유와 해방의 길이며, 창조와 발견, 자각과 성장, 평화와 기쁨의 길, 더 할 수 없이 아름답고 보람된 길이 되기 때문이다.

끝으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은 그가 약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약해지고 낮아져서 거룩한 사랑의 뜻을 이루려 함이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을 지지 말라'는 말씀을 붙잡고, 독점적 배타성을 벗은 포용의 열린 신앙의 길을 열어가는 여러분이 되길 소망하며, 지금껏 '메타노이아'라는 주제로 변변치 못한 필자의 거친 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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