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

[ 논단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3월 30일(수) 14:48

중학교 2학년 때 담임은 영어선생님이셨다. 출석을 부른 뒤 흑판에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라는 두 마디를 영어로 쓴 뒤 따라 읽으라고 하셨다.

그 일은 수업시간마다 반복되었고 속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아이들은 그 문구를 따라 읽곤 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선생님의 별명은 천천히(Slow)로 정해졌다. 선생님은 자신의 별명을 온몸으로 시연하려는 것처럼 모든게 느렸다.

말도, 걸음걸이도, 도시락 먹는 속도도 느렸다. 비가와도 뛰는 법이 없고 퇴근도 제일 늦게 했다. 그리고 늘 깊은 사색에 잠긴 모습으로 일상을 꾸려나가곤 했다. 왜 그 분이 느림보 행보를 했는지 천천히, 확실하게 속에 담긴 교훈이 무엇인지를 깨닫기 시작한 것은 철이 들고 나이테가 굵어지기 시작한 뒤였다. 그것은 그 선생님의 삶의 지주였고 철학이었다.

농경문화가 삶을 지배할 때 우리네는 서둘거나 덤빌 일이 없었다. 기껏해야 소달구지나 지게가 운송수단이었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지나 최첨단 정보사회로 치닫는 현대 사회의 경우 '천천히'를 암송하다가는 발전은커녕 생존도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 느려서 좋은 것은 별로 없다. 비행기, 열차, 자동차, 인터넷, 그뿐인가 모든 운동은 달리기로 승부가 난다.

축구, 스케이팅, 스키, 육상이 그렇다. 문제는 달리기 신드롬에 세뇌된 현대인의 경우 인생, 삶 까지도 속도전으로 승부하려 든다는 것이다. 출세도 빨리, 치부도 빨리, 성공도 빨리, 서둘고 단축하려다 무너지는 굉음이 사방에서 터진다.

신앙인의 세계나 목회자의 세계에도 '빨리' 바이러스가 잠입해 조급증으로 시달리고 있다. 교회출석 3년만에 신앙거목이 되기를 바라는가하면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직분을 탐한다.

건너편 교회가 급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능력은 돌보지 않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목회자도 있다. 화초나 관상목은 1년정도만 키워도 모양새가 화사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거목은 수십년, 수백년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거목이 쓰러지는 소리는 크고 파장이 넓다.

인생은 마라톤이다. 단거리 경주로는 승부를 가릴 수 없는 것이 인생이다. 신앙도 장거리 경기와 같다. 그래서 바울은 사역 마무리에 앞서 "달려갈 길을 다마쳤다"는 완주자로서의 고백을 남긴 것이다.

우린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을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성경주석 학자들은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이 직선거리를 따라 행진한다면 6개월 안에 가나안 땅에 진입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그들은 40년 후 가나안에 도착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지만 천천히 확실하게를 생활화 시키려는 하나님의 의지와 섭리로 보아야 한다. 여리고를 점령할 때도 그랬고 요단강을 건널 때도 서둘지 않았다.

왜 우리는 서둘고 보채는가? 왜 물러설 줄 모르고 돌진하는가? 그래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빨리빨리"가 마치 한국인의 닉네임처럼 상용되는 것을 본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근성이 경제성장을 가져왔고 강국을 만들었다. 6.25 전쟁의 폐허에서 경제 대국의 기적을 일궈 낸것도 바로 그 근성의 힘이 컸다. 그러나 눈비바람 맞고 큰 나무가 온실에서 자란 나무보다 강하다. 사람은 생물학적 과정을 거쳐 성장해야 한다.

그런데 빨리 키우기 위해 약물을 복용한다면 정상적 발육이 될 수 있을까? 빨리 서두르다 일을 그릇치는 것 보다 '천천히 확실하게' 이것이 필자의 소신이다. 구속 사역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역시 30년 긴 준비기간을 거친 후 3년간의 공적 사역으로 구속을 이루셨다.

시속을 낮추고 우리네 삶의 정황이 확실한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그리고 전투적 돌진자세를 내려놓아야 한다. 필자는 거북이와 토끼 우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선 자가 승자가 아니라 완주자가 승자라는 교훈에는 동의한다. 나중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자라는 사실도 수용한다. 과속 경쟁 사회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천천히 그리고 확실하게'로 신앙과 삶을 갈무리한다면 마무리 지점에서 웃는 자가 될 것이다.

박종순목사
충신교회 원로
증경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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