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을 되찾아야 할 교회

능력을 되찾아야 할 교회

[ 목양칼럼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11년 01월 11일(화) 16:28

주님의 사역은 말씀과 능력의 사역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사역은 오늘 우리 교회들 속에서 살아있어야 하고 그대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현대교회는 능력은 거의 전멸하고 말씀사역만 남아 있다. 왜 초대교회가 일상생활의 일부처럼 가졌던 치유와 능력사역이 현대교회까지 오는 동안에 이렇게 완전히 증발되고 말았을까? 맥너트(Francis Macnutt)는 그 이유에 대해 'Nearly Perfect Crime'(거의 완벽한 범죄, 서울: 순전한 나드, 2007))이란 책에서 이것을 역사적으로 아주 잘 짚어주었다. 특히 장로교회의 목회자들은 반드시 한 번은 읽어야 할 책인데 책 제목이 암시하듯 그 내용은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눈으로 볼 수 있고 귀로 들을 수 있는 표적으로 어느 때나 경험했던 초대교회가 현대교회로 넘어오면서 점차로 성령의 사역과 치유를 거의 완벽하게 잃어버리게 된 것은 교회 안에서 능력을 앗아가려는 사탄의 하수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완전범죄였다'라는 것이다. 

실제로 초대교회는 성령세례와 예수님의 치유, 그리고 축사사역도 계승했으며 그때는 특별한 치유자나 축사사역자들이 없었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모든 신자들이 다 치유와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을 적극적으로 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교부 성 유니게아(St. Engenia, 3세기)도 말한 증언이다.

또 교부 오리겐은 "초대교회는 배우지 못한(문맹의) 사람들이나 가장 평범한 사람들도 귀신 쫓는 사역을 행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아주 단순한 기도와 탄원으로 귀신을 쫓아냈다"고 말한다. 이것은 초대교회는 목회자만이 아니라 목회자의 마음을 가진 자는 누구나 다 치유를 행할 수 있었다는 정확한 근거가 된다.

그런데 4세기 무렵의 교회들은 이미 교회가 크게 확장되면서 조직과 행정에 힘이 강조되는 동시에 중요한 치유, 능력의 사역은 변방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심지어 영적인 지도자들조차도 치유의 은사들을 사용하는 데서 손을 떼고 있었고 교회 당국이 예배의식의 상징적 의미에 집중하면서 성령이 부어질 때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줄어갔으며 결국 교회 안에는 능력은 상실한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아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치유를 잃어버리게 된 큰 요인은 중세교회 속의 고난의 미화였다. 고난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라고 생각하다보니 질병이 생기면 그것을 치유하려는 의지보다 그 질병 자체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의 고난으로 알고 그냥 짊어지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플라톤의 가르침을 받은 고도의 지성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영혼을 위해 육체를 고난 받게 하는 경향이 중세교회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물론 고난은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며 그것을 이겨내는 연단을 통해서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숙해 가는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짊어지지 않아도 될 질병을 예수의 권세와 능력으로 치유조차 시도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빼앗아가며 교회를 몰락시키려는 사탄의 공격에 교회가 정복당한 것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교회의 변질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변방으로 밀려난 치유와 능력 사역에 여전히 헌신하고 있었기에 신사도주의 운동의 사람들을 거쳐 오늘 이 땅의 교회들 속에 다시 성령님의 임재를 환영하는 교회들로 재창조되고 있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가 외적인 것에 치중하면 본질을 잃어버리게 된다. 대헤롯성전이 지어지는 것을 보면서 통곡하셨던 주님은 점점 더 대형화되고는 있으나 능력은 상실한 한국교회를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계실까? 한국교회의 미래는 능력을 되찾아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최성욱 / 목사 ㆍ 예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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