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화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

평화와 화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

[ NGO칼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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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10월 15일(금) 16:32

평화와 화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이다

오상열
목사ㆍ 기독교평화센터 소장

평화교육과 훈련을 진행하면서 가끔 참가자들에게 단시일 내에 갈등을 해결하고 평화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방법 혹은 기술(skill)을 요구받거나, 아주 좋은(?) 매뉴얼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을 때가 있다. 평화와 화해에 대한 갈급함이나 빨리 해결해야 할 갈등이 있기 때문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지만 평화와 화해는 기술습득과 매뉴얼 제작을 뛰어넘는 매우 근본적이고 광범위한 그 무엇이다. 굳이 상징적으로 표현하자면 평화와 화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정의 이미지에는 모험의 의미가 담겨있다. 창세기 12장 1절에는 모험으로서의 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평화와 화해는 우리와 친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와 관계가 불편하거나 원수된 사람들과의 사이에서 필요한 것이다. 이사야에서는 종말적인 평화의 모습을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어린 암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찐 짐승이 함께 거한다(이사야 11:6)"고 표현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우리의 사랑을 '원수'들에까지 확대할 것을 말씀하셨다.(마태 5:44)
 
원수들과 평화와 화해를 이루고 원수들에까지 사랑을 확대하는 것은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니다. 시행착오와 실수를 각오하면서 그 상황과 관계에 맞게 창조적으로 평화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따라서 평화와 화해는 이벤트나 업적이 아닐뿐더러 간편한 요리 레시피가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면서도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다.
 
또한, 여정의 이미지에는 시간의 의미가 담겨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 17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신분상으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하지만 우리가 구원받는 순간 모든 존재가 순식간에 바뀌어 성인 혹은 피스메이커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신분은 바뀌었지만 존재가 '옛(old)' 피조물에서 '새로운(new)' 피조물로 변화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것은 우리의 존재가 '새로운(new)' 피조물로 변화하는 과정이며 따라서 긴 시간이 필요하다. 평화와 화해는 저절로 단 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린 시절부터 가정과 학교, 특별히 교회에서 신앙교육으로서 평화와 화해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지금, 주일 학교의 위기가 거론되고 있으며, 기독교학교에서는 신앙교육과 예배에 대한 어려움이 많이 있음은 모두가 알고 있다. 법적인 측면과 교육학적인 측면이 고려되어야 하겠지만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는, 재미있으면서 유익한 평화와 화해의 교육과 훈련이 시작되어야할 시점이다. 이런 면에서 평화와 화해에 대한 교회의 새로운 관점이 필요한 때이다.
 
따라서, 모험과 시간이 많이 걸리는 여정으로서의 평화와 화해를 이루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여정을 시작할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야곱이 에서와 만나기 위해서 고향으로 되돌아갈 때 하나님이 야곱과 늘 함께 동행하시겠다는 약속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여정으로서의 평화와 화해의 과정을 용기를 내어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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