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없이 볼 수 없는 4.19..."

"눈물없이 볼 수 없는 4.19..."

[ 교계 ] 4.19 50주년, 교회의 예언자적 기능 회복 필요

김혜미 기자 khm@pckworld.com
2010년 04월 11일(일) 00:23

"눈물없이 볼 수 없는 4ㆍ19 유혈참사사건에 교회여론은 어떠한가 기자는…."

   
▲ 제2묘역에는 4.19 혁명 당시 부상당한 사망자, 제3묘역에는 4.19 혁명 유공 건국포장 수상자들이 안장돼있다. 이곳에는 고인의 종교를 구분할 수 있는 십자가나 성경구절이 표시돼있는 반면 4.19 당시 사망자가 주로 안장된 제1묘역에는 아무런 종교적 표시가 없다.

지령 5백32호 기독공보(1960년 4월 25일)에 실린 기사의 머리글이다. 일주일 후 5월 2일자 신문의 1면에는 전국교회에 4ㆍ19 희생에 기도위문을 호소하는 총회장의 서신과 장례식 주례, 병상위문, 시신운구 등 4ㆍ19 희생자를 위한 군목의 숨은 활동이 소개되고 있다. 50년 전 기자의 호기심을 좇아 지난 10일 서울 강북구 수유리 소재 국립 4ㆍ19 민주묘지를 찾았다.

50주년을 맞이해 새단장을 마치고 지난 1일 재개관한 4ㆍ19 혁명 기념관에 들어서자 어린 아들의 손을 꼭 잡은 어머니가 "학생들이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려고 싸운 거야. 모두 훌륭한 분들이야"라고 설명해주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전시관 초입에는 "오늘이 마지막인가. 생각하면 갈갈이 흐터저 나가는 이 슬픔을 그 누가 만들었단 말입니까"로 시작하는 조사(전국 4ㆍ19 혁명 중ㆍ고등학생 대표 조지현목사 기증)가 전시돼 있다. 관련 영상을 통해 들려오는 함성소리는 마치 그때 그 시절 사건의 현장에 들어선 듯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3층으로 된 기념관은 각각 기념전시공간, 교육문화공간, 옥상전망대 등으로 구성돼있다. 영상체험관, 염원의 벽, 명사방명록, 어린이 체험교실 등 관람객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재조성된 것이 특징. "저도 해군이 되어서 나라를 지키겠습니다." 어느 관람객의 추모 메시지가 최근 천안함 침몰로 희생당한 장병들을 떠올리게 했다.

 

   
▲ 50주년을 맞이, 4.19 혁명 기념관이 새 단장을 마치고 지난 1일 재개관했다. 사진은 염원의 벽에 남겨진 한 관람객의 추모 메시지.

이날 기념관에서 만난 문성운집사(청량리교회)는 "나라를 위해 무고한 피를 흘린 학생들을 보면서 우리를 위해 죄없이 피흘리신 예수님을 생각했다"면서 "이들의 희생없이 우리는 지금 이렇게 살 수 없었을 것인데 마땅히 이들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기념관을 나와 영락교회 대학부 소속 학생이었던 김치호군(고 김익순장로의 아들, 서울대 문리대생)의 묘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영락교회는 김 군의 장례를 가족장이 아닌 교회장으로 치뤘다. 4ㆍ19 발생 5일 후 당회에서 위문금 1백만환을 부상당한 환자에게 보내기로 결의하기도. 제2, 제3묘역을 먼저 지나는데 곳곳에 십자가가 눈에 띄었다. 총 79명의 안장자 중 개신교 12명, 천주교 2명, 불교 1명. 하지만 김 군을 비롯해 4ㆍ19혁명 당시 사망자들이 안장된 제1묘역에는 아무런 종교적 표시가 없었다.

   
▲ 당시 영락교회 대학부 소속 학생이었던 김치호군의 묘역. 김 군의 장례는 교회장으로 치러졌다.
지난 3일 열린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한규무) 정기발표회에서는 "4ㆍ19 당시 기독교인 개인 차원의 활동이나 희생은 있었지만 '한국교회'의 역할은 없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한편 김치호군의 죽음에 대해 '영락교회 50년사'는 "외쳐야 할 때 외치지 않고 나서야 할 때 나서지 못한, 예언자적 기능을 다하지 못한 기성교회와 교계 지도자들을 향한 준엄한 질책의 거룩한 희생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당시 새문안교회 청년들과 연세대 학생회에서도 교회의 각성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고 이는 시간이 흐르며 교회의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4ㆍ19 50주년, 예언자적 기능을 회복한 한국교회의 모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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