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부터 '사람'입니까?

어느 때부터 '사람'입니까?

[ NGO칼럼 ] 엔지오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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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2월 04일(목) 10:15
김현철 / 낙태운동반대연합 회장 대행

2007년 7월 9일, 대법원 2부(주심 박시환 대법관)는 2001년 임산부의 출산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임산부는 제왕절개 시술을 하게 하고 태아는 사망하게 이르게 한 혐의(산모에게는 과실치상, 태아에게는 과실치사)로 기소된 조산사 서 모씨(58ㆍ여)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 출산 예정일이 2주나 지났는데도 자연분만을 기다리다가 태아가 저산소증으로 사망에 이른 것이다. 사산아는 42주로 5.2kg이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산모가 진통을 느끼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태아가 업무상 과실치사죄의 객체인 사람이 됐다고 볼 수 없다"고 무죄 판결의 이유를 밝혔다. 산모가 규칙적인 진통을 동반하면서 분만이 개시된 시점부터 태아를 사람으로 본다는 것은 분만 직전의 태아는 사람이 아니라는 경악할 논리이다. 이 판결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진통설로 인간됨을 결정했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된다.

생명의 시작에 대해서는 기독교 윤리의 입장을 언급하기 이전에 생명과학에서 객관적인 근거를 얻을 수 있다. 현대 의학의 결론은, 난자와 정자가 만나 수정되는 순간부터 46개의 인간염색체를 지닌 독립된 인간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아직 인간이 아니기에 추가하거나 삭제할 유전자 정보가 없는 완전한 인간이다. 수정된 생명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그 크기를 키워갈 뿐이지 '인간됨'을 보충하지는 않는다. 수정으로부터 출산까지의 과정을 보면, 인간이 아니었다가 어느 단계에서 인간으로 돌변하는 '혁명적 기점'이 없다. 생명탄생의 혁명적 기점은 오직 잉태의 순간이다. 즉, 수정 이후에는 생명이 연속선상에 있다는 것이다.

수정란, 배아, 태아, 인간, 이 모든 용어가 생명을 일컫는 다른 표현들이다. 그런데 용어를 달리 사용함으로써 뱃속의 아기를 인간으로 느끼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배아줄기세포 연구를 반대하는 이유나 낙태를 반대하는 이유는 동일하다. 종교적 신념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생명과학에서 인간생명의 시작을 수정의 순간부터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이다. 수정된 순간부터 이미 형성된 인간을 그 누구도 손댈 수는 없는 것이다. 열다섯 살부터 인간이고 열네 살까지는 아직 인간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누가 그것을 진리로 받아들이겠는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그런 식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고 그런 식으로 인간을 대우하고 있다. 판결을 내린 법관에게 문의하고 싶다. "임산부들이 산부인과 병원에서 산전 진단을 받으면서 초음파 검사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누구를 검사하여 건강상태를 살피자는 것인가? 태아가 인간이 아니라면 왜 비용을 들여서 건강진단을 하며 사진까지 찍는 것인가?"

태아는 임산부 신체의 일부분이 아니며, 마땅히 보호되어야 할 독립된 인격을 가진 개체이며, 성인과 동일한 생명체이며 사람이다. 생명권이 보호되어야 할 민주주의 국가에서 진통이 개시되지 않았다고 하여 사람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은 생명질서를 어기는 중대사건이다.

예수님은 46개의 인간염색체를 가진 배아로 마리아의 자궁에 잉태되었다. 창조주이신 그분이 현미경으로만 보이는 미물인 배아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상상해 보라. 인간과 똑같은 삶의 과정을 밟기 위해서 그 어떤 부분도 생략하지 않고 처음부터 성실하게 고난을 받으셨다. 한 살짜리 아기로 이 땅에 태어나지 않으셨고, 서른 살짜리 어른으로 갑자기 나타나지도 않으셨다. 배아로부터 시작해서 40주 동안을 자궁 속에서 성장하시며 베들레헴에서 출산할 때까지의 과정을 모두 거치셨다. 그것이 곧 인간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성육신 과정은 '언제부터 인간인가?'라는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준다. 이와 같이 기독교인에게는 더욱 뚜렷한 생명정의의 근거가 있으니 생명을 경시하는 세태 속에서 생명을 존엄히 여기고 생명을 건지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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