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불신지옥'을 보고

영화 '불신지옥'을 보고

[ 기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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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9월 02일(수) 16:16
최성수/신학박사ㆍ장신대 출강

갑작스럽게 동생이 사라진 긴박한 상황, 그래서 서울에서 숨 가쁘게 살아가는 자신을 불러들인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경찰에 신고하기보다는 오히려 더 열심히 기도할 것을 다짐하는 엄마의 말을 듣는 순간 필자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시작되는 거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영화가 정상적인 믿음의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은 포스터를 보고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영화의 장면에 대한 필자의 반응은 무척 당황스럽기만 했다.

'밀양'을 보고 너무나도 정확한 교회의 신앙생활과 성도들의 내면이 표현되는 것을 보았을 때 느꼈던 역겨움과 비록 동일하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비슷한 것이었다. 영화의 장면들이 낯설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과 교회의 치부가 들어날 것에 대한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사실 이런 어설픈 감정 상태는 영화의 결과를 다 알고 나서야 사라지게 되었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영화관을 떠나 묵상의 시간을 가지면서 깨달은 것이지만 필자를 다소 혼란스럽게 만든 장면은 너무나도 정확한 교회의 한 단면을 재현한 것으로 비합리적인 결정과 신앙의 담대함을 동일시 여기는 관행들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는 단지 교회의 이런 비합리적인 혹은 일부 광신도들의 신앙을 폭로하려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교통사고로 인해 남편을 잃고 또 의학적으로 회생이 불가능할 것 같다고 판단된 둘째 딸의 상태가 기도를 통해서 회복되었다는 사실은 기도와 초월적인 세계가 엄마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를 잘 말해주는 것이다. 초월적인 존재와 세계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이며, 초월적인 세계와의 소통은 오직 기도밖에 없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더욱 커지게 되리라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그녀에게 있어서 기도란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었다. 가족이 건강하고 또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죽은 자까지도 살아날 수 있게 하는 능력이었다. 능치 못함이 없게 만드는 것으로 그녀에게 그것은 복을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밀양'에서 기도는 상처 입은 영혼을 치유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죄를 용서받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었다. 기도가 피해자는 물론이고 -피해자의 용서의 선언이 없는 상태에서-가해자까지도 치유해 그로 하여금 평안한 삶을 살게 해 준다는 사실에 충격을 입은 신애는 오히려 기도에 반감을 품는다. 이로써 이창동 감독은 초월적인 것과의 소통에 의지해서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인간의 한계를 폭로하면서, 고통의 문제는 적어도 인간과 인간의 소통관계를 통해서 먼저 해결되어야 하며, 뿐만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에게는 늘 함께 있어주는 존재가 큰 위로가 된다는 것임을 역설하였다. 인간의 소통이 전제되지 않는 기도에 대한 깊은 회의를 읽어보게 된다. 이창동 감독이 '밀양'에서 폭로하고 있는 바로 그 기도의 한계를 '불신지옥'의 이용주감독은 다른 맥락에서 더욱 구체화시키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데에서 인간의 탐욕을 본 것이다.

교통사고에서 기적적으로 회생하게 되는 과정에서 기도가 있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여겨지는 것은 당연하다. 감사와 찬양, 그리고 헌신적인 삶이 이어지는 것 역시 신앙생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하지 않은 것 같다. 초월적인 힘을 통해 다시 살아난 둘째 딸에게서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지나친 식욕과 앞 일에 대한 예언, 그리고 치유의 능력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그녀에게 일어난 사실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지만, 사실 기독교는 하나님의 은사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용주 감독의 관심은 기독교적인 맥락에서 그것이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초자연적인 현상에 집착하여 인간과 한 성도로서의 위치를 떠나 결국 믿음의 본질에서 벗어난 인간의 탐욕을 폭로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성도로서의 삶에 집중하지 못한 엄마는 기도를 단지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게 되고, 예언적인 현상과 치유의 능력으로 이익을 얻으려는 아파트 주민들은 무속적인 기복신앙들과 혼합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둘째 딸의 희생은 사실 기복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엄마를 비롯한 아파트 주민들의 탐욕의 결과였다.

재미있는 장면은 철저하게 합리적인 사고를 대변했던 형사에게 일어난 태도와 생각의 변화다. 동생의 실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일어나게 된 일련의 사건들 속에서 사람들은 어떤 초월적인 현상이었음을 말하지만 그는 끝까지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런 그도 절망할 수밖에 없는 순간이 있었는데, 불치병으로 죽음의 문턱에 있는 딸이다. 어린 딸이 병상에서 회복되기를 바라는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겠는가! 오직 이 간절한 심정으로 그는 치유의 능력이 있다는 부적을 구해 사용해보려고 하고, 또한 빙의 현상에 압도되어 그 앞에 굴복해 딸의 생명을 위해 구하는 비합리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그 결과였을까? 딸은 마침내 병에서 회복된다. 그녀의 회복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비합리적인 신앙의 힘을 보여주는 것 같지만 영화는 그녀의 앞날에 어떤 불행한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암시해주는 장면으로 막을 내리고 있다.

장르상 공포영화라서 인지하기 쉽지 않겠지만 영화 속에 등장하는 죽음들이 타살이 아니라 한결같이 자살이었다는 사실은 이 영화가 인간의 탐욕과 그 결과들을 보여주는 데에 집중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탐욕은 결국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길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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