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로 힘의 균형…'정의실현''

제도로 힘의 균형…'정의실현''

[ 기고 ]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8월 13일(목) 10:18


3. 균형 잡힌 인간 이해의 중요성

 우리 사회에는 기독교윤리에 대한 편견과 오해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오해의 배경에는 기독교윤리를 제대로 설명하고 가르치지 못한 전문가들의 책임도 크다. 윤리는 옳고 그름에 대한 이론적인 연구이며,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을 제시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의 윤리는 인간의 주관적인 관점이나 어느 특정한 이론에 근거해서 행위를 판단하거나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근원인 성경 말씀을 기초로 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인간에 대한 낙관적 혹은 비관적으로 편향된 이해를 지양하고, 균형 잡힌 들 기독교적 인간이해를 정립하고 정의와 사랑의 변증법적 윤리를 제시한 라인홀드 니버의 균형잡힌 신학 및 윤리적 지평이 주는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건전한 기독교윤리를 세우기 위해 중요한 것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하게 알아야 한다. 인간은 윤리와 관련해 볼 때 양면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성경의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다른 어떤 피조물과 비견될 수 없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특별한 존재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만이 갖고 있는 '이성'을 인간의 특징으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또한 분명한 것은 인간은 철저하게 타락한, 죄로 인한 교만과 이기심에 가득 찬 존재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라인홀드 니버의 경우에는 이를 가리켜 인간의 '가능성'과 '불가능성'이라고 구분하여 설명한 바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합리성을 우선적으로 존중했던 고전적 이론을 거부하고, 오히려 인간의 탐욕과 사악한 야심으로부터 발생하는 악의 요소에 주목하였다. 인간은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갖는 죄인이기에, 인간들이 만든 제도와 법도 절대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상대적이며 잠정적인 것이 되는 한계를 갖는 것이다. 사실 인간이 실현하는 선은 절대적인 선에 가까운 근사치(approximation)일 뿐이다. 그런데 근대의 합리주의자들은 이성을 지나치게 신뢰하여, 이성을 신과 동일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을 인간의 창조성의 근원으로서, 혹은 질서와 덕망의 근원으로서 인정하려고 하였다.
 인간의 죄성과 한계를 강조하면서 윤리적 가능성과 필요성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태도도 잘못된 것이다. 인간을 완전한 도덕적 성취가 가능한 존재로만 평가하는 것도 기독교 신학적으로 옳지 않다. 즉 바른 기독교의 인간관은 피조물로서의 한계와 도덕적 담지자 및 행위자로서의 인간을 조화롭게 발전, 부각시켜야 한다. 이런 면에서 인간을 가리켜 '불가능한 가능성'(the impossible possibility), 혹은 '가능한 불가능성'의 존재라고 본 라인홀드 니버의 윤리는 탁월하다는 평가를 듣는 것이다.

4. 집단의 죄악성, 사회윤리의 필요성
 
 니버는 디트로이트에서 산업사회의 비인간성을 경험하면서,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ch) 등이 주창한 '사회복음주의운동'의 순진함(naivete)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부패한 이기심에 의해 좌우되는 산업사회의 비참한 현실을 깊이 있게 꿰뚫어 보지 못한 채 산상수훈을 실천하려 했으며, 이를 통해 미국의 불의한 사회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니버는 한 인간을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시킴으로써 핵문제와 같은 사회문제들까지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나, 대도시의 문제들이 성적인 악에 기인한다는 '피상적인 윤리'를 비판하였다.
 기독교인이 느끼고 담당해야 할 죄책과 책임의식이 얼마나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간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니버는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사회(집단)의 악한 측면을 직시하고, 제도와 법 등으로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기독교현실주의를 주장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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