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운동을 위한 해외교회의 노력

통일운동을 위한 해외교회의 노력

[ 특집 ] 6월 특집 / 한국교회의 평화 통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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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06월 17일(수) 13:46

박경서/이화여대 석좌교수ㆍ평화학연구원장

1980년대는 1945년부터 시작된 미ㆍ소의 냉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대였다. 미ㆍ소의 냉전은 한국교회에 평화와 화해라는 선교적 명제를 더욱더 절실하게 요구하고 있었다. 이같은 환경을 분석하면서 세계교회협의회(WCC)는 필립 포터 총무를 중심으로 활발한 선교활동을 펼쳤다.

북한 교회는 1984년 주 제네바 북한 대사를 통하여 WCC에 준회원국으로 가입할 수 있는가를 문의해 왔으며 WCC의 헌장에 의해서 준회원국이 되기 위해서는 세례교인 5만 명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준회원국이 되려는 생각을 거두었다. 그 대신 북한 교회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WCC의 필자를 방문하여 어떻게 해서라도 상호협력을 하려고 노력하였다.

1985년 WCC 에릭 바인가르트너(Erich Weingartner)와 빅터 슈(Victor Hsu) 두 사람이 북한 정부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일주일 동안 머물면서 일본 도산소에서 개최되는 한반도 평화와 화해를 위한 국제회의에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의 참석을 요청하는 초청장을 전달하고 귀국했다. 이를 근거로 1986년 일본 도산소에서 최초의 한반도 평화회의가 열리게 되었다. 약 60명이 참가했으나 북한의 대표들은 직접 참여하지 못하고 '모든 결정에 조선기독교도연맹은 찬성한다'는 전문을 보내와 제1차 글리온 모임이 모이게 된 것이다.

1986년 필자는 북한으로부터 초청을 받고 "WCC에 근무하는 동안 공산주의 국가를 여행할 수 있다"는 정부의 특별 허가를 받아서 1988년 6월 10일부터 2주 동안 남한 여권 소지자로서는 최초로 북한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87년에는 나이넨 코쉬(Ninen Koshy)교수가 평양을 방문한 것을 포함해 네사람의 WCC 간부들이 북한을 방문했고, 그 결과 북한 교회와 WCC 그리고 남한 교회가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986년 9월 2~5일 스위스에서 제1차 글리온 모임이 개최됐다. 이 모임의 권고에 따라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1988년 4월 25~29일 인천 송도호텔에서 '한반도 평화와 화해 그리고 통일'을 주제로 국제회의를 주관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처음으로 남북한 교회 지도자들이 만나는 모임을 위해 WCC는 세심한 준비를 했다. 예를 들면 북한 대표 5인(고기준, 김운봉, 김혜숙, 김남혁, 최기문)은 제네바역에서 철도를 이용해서 글리온에 도착하도록 했으며 남한 대표 6인은 버스로 글리온에 갈 수 있도록 주선하였다. 이는 서로의 어색한 만남을 피하기 위해서였으며 혹시 발생할지도 모르는 불상사에도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글리온 1차 모임의 주요 권고사항은 다음과 같다. △한국NCC의 '평화통일과 화해에 대한 교회의 선언' 지지 △평화통일을 위한 기도문 작성 합의 △남북교회 공동기도문 작성 지원 △1988년 제2차 글리온 모임 주선 △제7차 WCC 오스트레일리아 켄버라 총회에 북한 교회 대표 초청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하여 국제기구 및 UN과의 협력을 유도하며 UN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할 것 △천만 이산가족 상봉 지원 등이다.

1988년 11월 23~25일 제2차 글리온 모임이 개최됐다. 글리온 2차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산소와 글리온 1차의 권고안을 재확인하였고 다음과 같은 8개의 항목을 권고했다는 것이다.

△1995년을 희년의 해로 선포하고 8ㆍ15 직전 주일을 평화통일 주일로 지정하여 모든 예배문을 작성할 것을 WCC 회원 교회에 권고하기로 △1972년 7ㆍ4남북공동선언 지지 △한국인의 평화통일에 외세의 간섭을 배격하는 문서 작성 △동북아 평화를 위한 한반도 평화통일 적극 지지 및 남북의 분단 고착화 반대 △남북 신뢰구축을 위해 UN 매커니즘 적극 이용 △군비축소 △천만 이산가족 상봉 △조선기독교도연맹과 NCCK의 평화통일 프로그램 적극 지원 등이다.

제2차 글리온 모임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것은 대한예수교장로회의 당시 북한선교위원장 이의호목사가 참석했는데 평양 봉수교회 담임 이성봉목사를 만나 평양에서 주일학교를 같이 다닌 친구임을 확인한 것이다. 두 이 목사는 3일 내내 손을 잡고 같이 찬송하고 기도하며 평화와 화해의 사건을 직접 체험했다. 소망교회 담임 곽선희목사는 미화 1만 불을 북한 교회에 헌금하였다. 글리온 2차 모임도 성령이 충만한 모임이었으며 교회가 제사장적인 직분과 예연자적인 직분을 동시에 수행했었던 모범적인 사례였다.

제3차 글리온 모임은 1990년 12월 1~4일 남북한 교회의 대표들과 13개국의 교회 대표들이 분단 50주년을 맞는 1995년을 희년으로 선포하고 희년을 어떻게 기념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를 주목적으로 소집됐다. 이 모임의 배경에는 1989년 4월 미국장로교회(PCUSA)가 북한 교회 대표들을 미국에 초청하여 북한 교회를 미국에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있다.

또한 1989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WCC 중앙위원회가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한 WCC 정책문서'를 채택하면서 남한의 김형태목사, 북한의 고기준목사, WCC 에밀리오 카스트로 총무가 단상에서 서로 포옹하고 남북 교회의 단합을 보여준 이후에 소집된 모임이 바로 3차 글리온 모임이었다.

다음은 글리온 제3차 모임의 주요 결의안이다. △8ㆍ15 직전 평화통일 기도주일에 모범예배문안(Common Liturgy) 완성 △글리온 정신에 입각한 평화교육을 위한 커리큘럼 작성 권고 △한반도 통일운동 확산을 위한 프로그램 수행 △대규모 군사훈련을 자제할 것을 교회는 해당 국가에 권고 △방북 구속자 석방 탄원 △남북 시민간 접촉을 위한 모든 법적 구속 을 해제해 줄 것 △국제적십자간 남북 이산가족 상봉 적극 추진.

세 차례에 걸친 글리온 모임을 추진했었던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모든 모임은 진정한 신앙고백으로 추진되었기에 성공적이었다.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우리에게는 평화와 화해의 일꾼으로 부름을 받았다는 신앙고백이 있었기에 감히 당시에 이런 모임들이 추진될 수 있었다.

교회는 선교를 말할 때 예언자적 사명과 제사장적 직분이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1980년대 WCC가 수행했던 사회주의 국가의 화해 평화 치유 프로그램은 이상의 예언자적 제사장적 직분을 신앙고백으로써 추진했던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은 '다차원적 동시접근(Multi-Dimensional Approach)'이 실제로 모범 답안처럼 추진되었던 사례라 할 수 있겠다.

자유와 빈곤탈피, 질병예방, 행복추구 등 여러 분야를 망라하여 추진되었던 '다분야적 동시접근(Multi-Sectoral Approach)'의 대표적 성공 사례가 남북교회의 평화통일 화해프로그램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조선기독교도연맹(KCF)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일본기독교교회협의회(NCCJ) 미국교회협의회(NCC USA) 아시아기독교협의회(CCA) 세계교회협의회(WCC)가 한 몸이 되어 매끄럽게 협조한 프로그램이었기에 '다자간 협력(Multi Actors Participation)'이 이루어진 성공된 프로그램이었다.

이를  총칭하여  오늘의  유엔이  권장하는  21세기의  모범답안인  '포괄적 접근(Successful Comprehensive Approach)'은 이미 1980년대에 WCC가 주축이 되어 진행한 남북한 평화와 화해를 위한 프로그램에서 성공한 사례가 나온 것이다.

자유와 평화, 정의, 화해, 치유 그리고 창조질서의 보전은 오늘날에도 변하지 않는 교회의 선교 핵심임을 우리가 모두 알기에 80년대 글리온 모임들을 중심으로 회상하면 '그래도 성공된 본보기였다'고 회상할 수 있다. 당시의 일사불란하게 추진되었던 교회의 선교에 부어졌던 성령의 역사가 오늘의 대치된 남북의 대립을 녹일 수 있도록 다시 우리 교회들에게 임재하시기를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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