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와 평화' 강조된 통일 운동,한걸음씩 내딛어 온 한국교회

'정의와 평화' 강조된 통일 운동,한걸음씩 내딛어 온 한국교회

[ 특집 ] 6월 특집/한국교회의 평화 통일 운동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6월 03일(수) 14:01

김형태/증경총회장ㆍ연동교회 원로


1. 국가적 통일운동에 동참한 본 교단의 역사적 배경

1945년8월15일 일본의 패망은 한반도의 국토와 민족과 교회를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구조악을 낳게 했다. 북진통일을 주장하던 남한은 적화통일을 목표로 남침한 북한군에 의해 꺼져가는 등불이 되었다가 미국의 주도하에 UN군의 도움으로 수도를 탈환하고 휴전협정에 들어갔다. 이 후 남한 정부는 계속해서 실지회복과 반공통일을 국시로 삼을 정도로 북한과의 관계를 대결구도로 이어갔었다.

그러나 소련의 개방과 개혁 정책으로 동구권의 공산정권들이 민주화 되면서 미ㆍ소 양대 강국의 냉전체제가 해소되어 평화공존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남한 정권들도 세계화의 사조에 따라 남북의 관계를 교류협력의 방향으로 전환시키기에 이르렀다. 군사력 보다 경제력을 우선하게 되고, 그리고 미국의 핵우산과 UN의 협력에 의지하는 외교력을 택한 셈이다. 김대중대통령과 故 노무현대통령이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성사시켰으나, 일방통행적 성과라는 반대여론도 적지 않았다.

한편, 우리 교단은 처음부터 북한의 평양신학교의 '정통신학'을 중심으로 총회적 지도세력을 형성해 왔었다. 그런데, 6ㆍ25 전쟁으로 인해 북한의 대다수의 교역자들과 교인들이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남하하여 남한 전국에 수많은 교회들을 개척하고 교회들을 부흥 성장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리고 총회적 지도력도 이들에 의해 크게 영향을 받아 북한의 지역 없는 노회들도 초헌법적으로 그대로 유지했다. 이들 실향민들에게는 잃어버린 고향을 찾는 실지회복과 반공이념 그리고 북한전도를 염원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1958년 우리 교단이 분열되기 전후하여 소위 에큐메니칼 파와 복음주의 파의 극심한 교권분쟁으로 인해 본교단은 합동측의 '용공 신신학'이라는 비난으로 많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그것은 에큐메니칼운동의 세계적 교회연합체인 세계교회협의회(WCC)에 소련을 위시하여 공산국가들의 교회 대표들이 회원으로 참석하고 있어서 용공이라는 악선전을 받게 된 것이다. 결국 당시 에큐메니칼 지도자인 영락교회 한경직목사의 제안으로 교단의 화평과 통합을 위해 WCC를 탈퇴했으나 그 후 10년을 참고 기다려도 별 효과를 얻지 못해 우리 교단은 WCC에 재 가입을 결정했었다.

2. 에큐메니칼운동을 중심한 한국교회의 평화통일운동

1983년 캐나다 밴쿠버에서 개최된 WCC 제6차 총회는 '정의, 평화,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통전'이라는 주제를 지정했다. 이 주제에 따라 1984년 일본 도산소에서 WCC 국제위원회가 주최한 '극동의 평화와 정의 협의회'가 열려 한반도의 평화통일 문제를 처음 다루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WCC 국제위원회 직원들이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을 방문하여 교류협력의 길을 열었고, 이어서 미국NCC, 일본NCC, 서독교회, 미국장로교회 등 WCC 회원교단들이 한반도의 평화통일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다.

WCC를 통한 에큐메니칼 정신은 한반도의 통일을 언제나 '정의와 평화'의 통일운동으로 강조했다. 그것은 '점령적 평화'가 아니라 '정의가 함께한 평화'(약3:18)이다. 불의한 침략에는 항거하는 것이다. 1980년대에 들어서서 한국교회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를 통해 WCC의 후원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운동에 적극적이 되었는데, 1986년엔 스위스 글리온에서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 대표들과 남한의 NCC 대표들이 처음으로 함께 모여 한반도의 평화통일 문제를 논의했다.

그리고 1988년 2월 29일 연동교회당에서 모인 NCC 제37차 총회에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을 대내외에 발표하여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중앙정보부를 비롯한 사회 보수단체들의 극심한 반대와 협박이 연일 계속되었다.

우리 교단 안에서도 반공주의 이념에 철저한 인사들의 반대 또한 몹시 심한 편이었다. 그 중요한 반대 이유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분단과 증오에 대한 죄책고백'인데, "특히 남한의 그리스도인들은 반공 이데올로기를 종교적 신념처럼 우상화하여 북한 공산정권을 적개시한 나머지 북한 동포들과 우리와 이념을 달리하는 동포들을 저주하기까지 하는 죄(요 13:14~15, 4:20~21)를 범했음을 고백한다" 라는 구절이다.

또 하나는 미군철수 문제였다.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남북한 상호간에 신뢰회복이 확인되며, 한반도 전역에 걸친 평화와 안정이 국제적으로 보장되었을 때, 주한 미군은 철수해야 하며 주한 유엔군 사령부도 해체되어야 한다'라는 조항을 국가안보에 지나치게 민감하여 적대적인 감정이 섞인 반대를 한 것이라 하겠다.

마침내 1989년 9월 우리 교단 제74회 총회는 NCC의 88선언문을 반대하는 평화통일연구위원회의 일방적인 보고를 받았지만, 교단적인 총의를 집약한 결론은 더 연구하도록 했다. 드디어 1991년9월 본 교단 제76회 총회는 '한반도의 평화통일에 관한 본 총회의 입장'을 자구 수정하여 만장일치로 채택했는데, 이것이 오늘까지 우리 교단의 한반도 평화통일에 관한 공식입장이 되고 있다.

우리 교단의 공식 입장을 요약하면, 첫째로 의식의 전환이다. 적대감정을 불식하고 화해를 이루는 것이다. 둘째로 남북의 상호교류이다. 셋째로 무기감축과 핵무기의 제거 등 통일에 장애요인들의 제거이다. 넷쩨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해 국제적 여론형성이다. 다섯째로 남북이 스스로 개혁하여 민주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역할로서는 첫째 기도 할 것, 둘째 평화교육 실천, 셋째 적대관계 구조 극복 및 민족 상호간의 신뢰와 민족 동질성 회복, 넷째 한반도와 민족의 평화 비전 창출, 다섯째 전민족의 복음화와 선교 준비, 여섯째 세계교회의 평화운동과 연대를 지속 강화시킬 것 등이다. 이것은 NCC 88선언문과 별로 반대되지 않는 내용이라 하겠다.

3. 한반도의 평화통일운동을 위한 한국교회의 과제

첫째로, 남북한의 대결구도를 청산할 것이다. 남한에서 북한을 보거나 북한에서 남한을 보는 시각을 지양해야 한다. 또는 이념이 다른 민족을 기초로 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반도와 한민족과 한 교회를 보는 것이다. 원수를 용서하는 사랑과 화해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고후5:19). 현재 '남북한선교통일위원회'라는 용어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둘째로, 교단적으로나 교단연합적으로 교인들과 남북 국민들에게 평화교육을 실천하는 것이다. 평화교육은 에큐메니칼 운동의 하나이며 사회선교에 속한 것이다. 남북교류 협력을 통해 교인들과 남북 국민들의 문화의식이 탈 이념적이 되고 세계화 되도록 계몽하는 것이다. 연합교파적 기독교교육기관 등을 통해 평화교육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평생교육으로 시행할 수 있으면 좋겠다.

셋째로, NCC를 통해 WCC와 회원교단들 그리고 에큐메니칼 운동단체들과의 유대관계를 긴밀히 하여, 북한이 고립되지 않게, 그리고 핵개발을 중단하도록 설득하고, 그들의 국가안보의 불안의식을 완화시키는 방향으로 도와 줄 필요가 있다. 특히 6자회담 당사자국들의 교회연합기관(NCC)들을 통해 강력하게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억제하는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한다 해서 남한도 무력으로 대응한다면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불가능하고 전쟁의 수단에 의존하는 참혹한 민족 공멸의 사태를 낳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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