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의 시작ㆍ끝은 인간의 재량과 무관,오직 성령의 주도로 이뤄진다"

"전도의 시작ㆍ끝은 인간의 재량과 무관,오직 성령의 주도로 이뤄진다"

[ 특집 ] 3월특집/성숙한 3백만 성도운동을 바란다/순전한 복음 전도

한국기독공보 webmaster@pckworld.com
2009년 03월 19일(목) 11:50

김선일 /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 교수ㆍ실천신학

삶의 많은 문제들이 기본에 충실함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다. 건강이 안 좋을 때, 이런 저런 약재나 사술을 좇기보다 고른 영양섭취와 운동이,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욕심을 거두고 자족하며 사는 것이 가장 간단하고 확실하면서도, 가장 실천이 안 되는 대안이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한국교회에 전도가 어렵다는 인식이 날로 팽배해진다. 아마 상황이 여유롭다면 3백만 성도운동이 시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현재의 위기를 진단하고 해법을 찾는 다양한 시도들이 있다. 교회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을 상쇄하기 위해서 친절과 호의를 베푸는 방식의 '이미지 전도'라는 용어가 등장했었고, 현대인들의 문화적 감수성에 적극적으로 복음을 조율시키는 '맞춤 전도'도 많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들은 전도라는 단어가 안고 있는 일률적이며 강요적인 인상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종교개혁과 같이 역사적으로 유의미한 신앙 갱신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려는 대증요법에 머무는 수준이 아니라, 근본으로 돌아가려는 몸부림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복음은 언제나 시대의 옷을 입고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에, 청중과 문화를 배려하는 일은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지금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전도의 문제는 오히려 콘텍스트의 과잉으로 텍스트가 소외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수 년 전 미국의 대표적 복음주의 잡지인 '크리스챠니티 투데이'는 20세기 기독교의 최고 저작으로 C. 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를 선정했다. 여기서 '순전한'(mere)은 가장 본질적이고 최대공통분모를 의미한다. 루이스는 주관적 신앙체험이나 특정 교단의 전통을 배제한 채, 기독교 신앙의 '원석'만으로 탁월한 변증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전도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도 수많은 성공 경험담과 프로그램을 전방위로 내세우는 복음전도의 가공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러는 가운데 역설적으로 복음전도의 순전한 원석은 더욱 희미해지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가 아닐까? 신학적으로 곱씹고 반추해야 할 전도의 본질적 명제들, 즉 '순전한 복음전도'의 요소들로 다음의 세 가지를 꼽을 수 있다.

1) 전도는 성령의 주도로 이루어진다. 너무도 당연해 보이는 이 대명제가 실상은 늘 침범 받는다. 성령행전이라 불리는 사도행전은 전도의 전 과정이 성령의 전적 주권에 달려 있음을 보여준다. 빌립, 베드로, 아나니아 등은 성령이 인도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뿐이다. 대중집회가 성공적인 전도를 보장하지도 않았다. 베드로의 설교에 3천명이 '마음에 찔려' 회개했지만, 스테반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려' 이를 갈았다. 전도는 인간이 함부로 측정할 수 없는, 성령의 신비하고 주도적인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전도 프로그램들은 효과를 보장하는 노하우들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한다. 그 결과 다양한 상황에 따른 성령의 인도를 구하며 방법을 찾기보다 소위 검증된 테크닉을 복제하기 바쁘다. 전도 집회에서 참석자의 몇 %가 일어서서 결단했다는 통계에 자화자찬을 하지만, 실상 진정한 회심이 일어났다는 증거는 희박하다. 

전도가 성령의 역사임을 결곡하게 받아들인다면 매뉴얼, 대본, 통계 등의 부흥공학으로부터 벗어나게 될 것이다. 또한 전도에 부담감을 안고 사는 성도들은 자유함을 얻게 된다. 말주변이 없고 수줍은 성격 탓에 전도의 직무를 수행하지 못한다는 죄책감으로부터의 해방이다. 전도에서 인간이 하는 일이란 성령께서 벌이신 일에 동참하는 것이다. 결코 시작과 결과가 인간의 재량에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성과를 요구하거나, 특정한 전도 기술을 전수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안의 소망과 비밀에 대하여 온유함과 두려움 가운데, 그러나 적절하게 대답할 준비를 요구할 뿐이다(골4:6; 벧전3:15).

2) 전도는 곧 말씀선포다. 오늘날과 같이 특화된 개념으로서 '전도'는 미국의 2차 대각성 집회 이후 두드러진 현상이다. 찰스 피니와 D. L. 무디의 탁월한 조직화와 동력화에 힘입어 축호전도, 영접기도, 제단 앞으로의 부르심 등이 전도사역의 표지들로 등장했다. 이를 통해서 회심자의 수를 계산하고 전도의 성과를 측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념해야 할 것은 신약성경에서 전도한다는 것은 곧 '말씀을 선포하다'(케뤼쏘)는 의미였지, 교리개요를 읽어주고 영접기도를 하는 일이 아니었다. 예수께서 전도의 사명을 천명하실 때도,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직무를 담당하라고 할 때도, 그것은 말씀선포의 사역을 의미하였다. 전도의 목적이 영혼의 근본적 회심이라면, 이러한 역사는 오직 말씀이 선포되는 현장에서 일어나며, 예배와 설교라는 교회의 가장 본질적인 사역이 중심을 차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전도관련 행사를 기획하고 문화적 맞춤전도에 집중하기 위해 예배와 설교에 들어갈 역량이 소진된다면 전도의 본질과 모순되는 것이다. 교회성장학자 톰 레이너에 의하면, 불신자들이 교회를 선택할 때 가장 중요하게 보는 요소는 '설교'로 나왔다. 설교가 중요하다는 것은 대체로 공감을 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어떤 설교냐 하는 것이다. 조사에서 두 번째로 많은 대답을 얻은 항목은 흥미롭게도 '교리'로 나왔다. 교인들의 친절함은 세 번째 고려사항이었다. 결론적으로, 사람들은 영혼과 공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고, 이는 세상의 지혜와 차별성을 갖는 신학적 올바름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신학의 과제는 설교의 과제와 동일하다"는 바르트의 말을 바꾸어, "전도의 과제는 설교의 과제와 동일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 전도는 여정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교회의 지속적인 쇠퇴로 고민하던 영국 국교회에서는 1990년대를 '복음전도의 십년'(Decade of Evangelism)으로 선언하고, 전도의 갱신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이한 점은 대규모 전도 집회나 행사를 기획하기보다는, 전도와 회심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시작한 것이다. 그들이 얻은 결론은 인간이 그리스도께로 회심하는 현상을 면밀히 관찰한 결과, 전도지를 받고 즉석에서 영접기도를 드리는 순간적 회심은 소수에 불과하며, 대부분이 신앙의 여정에 서서히 들어서서 점진적인 배움과 공동체의 경험을 통해 회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국 국교회는 고전적인 여정 전도 모델을 다시 복원하게 된다. 사실 여정의 동반자가 된다는 것은 더욱 버거운 일이다. 전도 대상자를 변화시키기에 앞서, 전도인 자신이 먼저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변화되어 자신과는 다르게 사는 이들을 용납하고, 하나님을 더듬어 찾는 그들의 영적 순례에 인내와 사랑으로 동행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특정다수에게 미리 포장된 복음을 들려주며 즉석 결단을 요청하는 전도방식이 지난 2백년 동안 특화된 전도사역이라면, 지난 2천년 간의 교회역사에서 가장 주된 전도방식은 공동체적 전도이면서 과정 중심의 양육전도였음을 고려할 때, 이는 낯선 방식의 전도가 아니라 전도의 본궤도로 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전도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전도는 실천적 사역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어떻게'(how)의 문제로 고민하게 된다. 그러나 모든 실천은 신학을 반영하며, 그 신학은 실천의 바른 목적을 성경적으로 조명해 준다. '무엇'(what)에 대한 신학적 고민이 없는 '어떻게'의 묘안들은 전도를 이 손님 저 손님 드나드는 천박한 여인숙 꼴로 만들 것이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전도의 열매는 공력의 증거가 될 수적 성과가 아니라,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에 증인으로 참여하는 것뿐이다(고전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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