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황의 사과

교황의 사과

[ 논단 ] 주간논단

김인수 목사
2008년 05월 07일(수) 00:00

김 인 수
미주 한인장신대 총장

 

교황 베네딕트 16세의 역사적 미국 방문이 최근 있었다. 미국 방문 중 그가 한 일 가운데 중요하고도 눈길을 끈 일은 미국 신부들이 저지른 성 추행에 대한 유감표명과 피해자들을 만나 사과하고 위로한 일이었다. 모두 약 5천 명의 신부들이 1만3천 명에게 못된 짓을 했는데 그것도 성인 상대보다는 미성년자들에게 한 일이 더 많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인간에게는 본디 두 가지 본능이 있다고 한다. 식욕과 성욕이다. 식욕은 자기가 살기 위해, 성욕은 자신의 종족을 이 땅에 남기고 본존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이 둘 중 식욕은 억제할 수 있는 한도가 있다. 어느 정도까지는 갈 수 있어도 한없이 갈 수는 없다. 이의 지나친 억제는 죽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욕은 식욕과 달리 얼마든지 억제할 수 있다. 신앙으로, 지성으로, 혹은 수양이나 수련으로 견디어 내면서 일생을 살 수 있다. 그러나 본능은 본능이어서 이 욕망을 억누르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이에 따라 성욕을 억제하지 못하고 범죄하는 일이 자주 발생하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법에 따라 성직자는 독신이어야 한다. 이는 2천년 동안 내려오는 관습이고 전통이다. 이런 성직독신주의(Celibacy)는 종교개혁기에 이르러 개혁가들에 의해 파기되어 성직자들이 독신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났다. 따라서 개신교회 성직자에게는 누구나 결혼 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처음부터 신부는 누구나 결혼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다만 주교 이상의 상위 성직에 오르고자 하는 신부는 결혼할 수 없으나 성직자는 누구나 결혼 할 수 없다는 획일적 굴레는 없다.

가톨릭교회의 모든 성직자는 누구나 매년 초, 세 가지 서약을 한다. 청빈, 순결, 순명(順命)이 그것이다. 순결은 이성과의 관계를 갖지 않고 깨끗하게 예수님의 신부로서 정절을 지키겠다는 서약이다. 그런데 신부도 인간이기에 이 서약을 깨뜨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우리는 먼저 일생을 정절로, 순결로 자기의 전 생애를 주님을 위해, 교회를 위해 헌신 봉사하겠노라고 신부 서품을 받을 때 맹약한 일과 매년 행한 서원을 깬 신부들이 비난의 화살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에 동감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간이 기본적 욕망을 제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하는 것을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매도할 수 없다고 본다. 신부가 못할 짓을 했다고 해서 돌을 던지기보다 먼저 저들이 그런 일을 행할 수밖에 없었던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물론 그런 행위를 정당화 한다거나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잘못했고 규탄 받아 마땅하다. 더욱이 어린이들에게 몹쓸 짓을 한 행위는 성인들에게 행한 행위에 비해 무한한 책임을 물어 마땅하다.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은 비단 오늘 교회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고, 가톨릭교회 2000년의 역사에서 줄기차게 일어난 사건이다. 중세 교회가 타락했을 때 교황으로부터 말단 신부에 이르기까지 정부(情婦)를 거느리고 사생아를 낳아 기르면서 성직에 임했던 세속화된 성직자들이 부지기수로 많았던 사실을 역사는 기록으로 남겨 놓았다. 이는 인간의 본성을 억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 입증하는 사실(史實)이다.

이번 일을 계기로 다시 한번 가톨릭교회 내에서 줄기차게 일어난 논쟁 중 하나인 신부 결혼 허용 문제를 심각하게 숙고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성직자의 독신제를 고집하면 이런 불미스런 일은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신부의 숫자는 많고, 그들 중 신앙으로 본능을 억제하기 어려운 사람도 없지 않으며, 정신적으로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2000년 동안 지속적으로 유지해 오던 전통을 이 시대의 교황과 추기경들이 깬다는 일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직 독신제가 하나님의 절대 명령도 아니고, 다른 교회, 특히 가톨릭과 가장 가까운 정교회도 결혼을 허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못 할 일도 아니다.

실제로 종교개혁기에 루터의 개혁운동과 타협하는 과정에서 가톨릭 측에서 신부의 결혼 문제와 성찬 시 평신도들에게 잔을 허용 할 수 있다는 타협안을 내어 놓은 일이 있었다. 그러나 타협할 시기가 이미 지나 성사 되지는 못했다.

천주교회가 신부들의 불미스런 일이 반복되지 않고, 교황의 사과가 반복되지 않은 길이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성찰할 때가 된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개혁의 선봉에 섰던 루터, 칼빈이 성직자의 결혼을 허락한 예지(叡智)가 다시 한번 빛을 발하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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