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에 첩첩산골 골짜기에 7백명이 예배

1907년에 첩첩산골 골짜기에 7백명이 예배

[ 우리교회 ] [우리교회] 순천노회 신황교회, 전남동부 최초 설립...소학교도 설립

박만서 기자 mspark@kidokongbo.com
2007년 05월 02일(수) 00:00
   
신황교회 예배당
1백년을 훌쩍 넘기면 선교 2세기를 향해 달음박질을 하고 있는 순천노회 신황교회(최수남목사 시무)가 해를 거듭할수록 침체의 늪에 빠져들고 있는 농촌교회 활성화를 위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1905년에 광주지역에서 복음을 받은 한태원이 구황리에 있던 자신의 서재에 모인 박희원 서병준 허준규 등 9인과 함께 신앙을 받아 들인 것을 시작으로 교회의 역사가 시작된 신황교회는 1907년 한국교회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던 당시에 6, 7백명이 동시에 모여 예배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료적 가치를 가진 교회로 손꼽힌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닌 신황교회는 최근들어 역사에 대해 눈을 뜨면서 최수남목사를 중심으로 뿌리 찾기에 나서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에 기록된 이 교회에서 일어난 1907년 부흥의 역사를 확인하게 되었으며, 이를 근거로 전라남도 동부지역에서 최초로 세워진 교회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를 찾는 쾌거를 이루었다.

신황교회의 이같은 역사의식은 지난 2005년 교회 창립 1백주년을 기해 '교회창립 1백주년 기념관'을 건축하고 건물 2층에 별도로 역사전시관을 설치해 교회 역사 자료들을 전시했다. 기념관 2층에 마련된 이 역사전시관에는 교회가 설립된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1백년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사료들을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신황교회는 1백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이에 걸맞는 역사적인 유적을 보유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해 아쉬워하며 사진 등으로 남아 있는 초기 교회당 건물 등을 복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워 놓았다. 신황교회의 첫번째 교회는 1907년 6, 7백명이 모여 합심해서 헌금해 건축한 8간 규모의 예배당이다.

   
1백주년을 기념해서 건축한 기념관에 마련된 사료전시관
뿐만 아니라 농촌지역 선교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것을 기대하며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1907년에 설립한 것으로 확인된 소학교 복원도 구상 중이다. 이에 대해 최 목사는 "젊은이들이 줄어들고 고령화 되어가는 농촌 사회와 교회에 어린이들이 찾아 올 수 있다면 새로운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될 것"이라며, "이미 민족 지도자를 교육하기 위해 1백년전에 교회에서 시작한 소학교의 전통을 이어받아 교회 시설을 이용한 특수학교 설립을 구체화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신황교회는 교회와 관련된 인물들이 유적지를 발굴하는 일에도 관심을 갖고 교회 주변을 역사 유적지 복원과 조각공원 등을 갖춘 역사와 쉼이 있는 공간으로 꾸미고 있다. 이 계획이 마무리 되면 교인들 뿐만 아니라 역사에 관심있는 사람들이 교회를 찾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해 교회는 물론이고 지역사회의 발전도 가져 올 것이라는 게 신황교회가 가지고 있는 청사진이다.

   
최수남 담임목사
이같은 신황교회의 구상이 꿈만은 아닌 것이 전형적인 농촌 지역에 교회가 위치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교회를 찾아 오고 있는 오늘의 신황교회 모습에 확인할 수 있다. 2000년에 처음 이 교회에 부임한 최 목사는 교회 부속 건물로 청년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선교관을 마련하고 청년들의 별도 모임을 가지면서 가능해 졌다. 당시 이 선교관에 모이던 학생 청년들이 이제는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외지로 나갔지만 주말이면 어김없이 교회를 찾아 함께 예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 예배에 5, 60명이 출석하는 작은 교회이지만 매주 토요일이면 20여 명의 교회 청년들과 함께 문자를 주고 받으며 연락을 하고 있다"는 최 목사는 "주일 예배에 청년들이 앞장서서 예배에 참여 찬양함으로써 교회의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자랑한다.

교회가 활기를 띠면서 지금까지 교회에 발길을 하지 않았던 주민들이 서서히 교회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매년 열리는 갖는 총동원 전도주일의 결과가 이를 말해 준다. 최근에 있었던 총동원 전도주일에도 전혀 교회에 발을 들여 놓지 않았던 주민들 상당수가 교회 문턱을 넘었다.

교회 창립 1백년의 역사를 새롭게 인식한 신황교회는 1백년의 역사 만큼이나 농촌 지역선교를 위한 새장을 열어가고 있음이 분명하다. 특히 과거의 역사에 안주하기 보다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사건들을 발굴하고 복원, 정비, 개발함으로써 선교의 뿌리를 만들어 가고 있어 주목을 받고 있다.



신황교회 역사이야기...1905년 설립

"현재도 자동차로 이용하지 않으면 쉽게 접근 조차 할 수 없는 산간벽지에 지금부터 1백년전에 6, 7백명이 모여서 예배했다면 믿어 지시겠습니까"

전남 광양시 진상면 황죽리 288번지 현재 신황교회가 위치하고 있는 곳에서 먼저 믿기 시작한 사람들이 합심 전도한 결과 1백년 전인 1907년에 6, 7백명이 함께 예배 했던 사건이 이후에 기록된 사기를 통해 확인됐다. 특히 현재 작은 규모의 전형적인 농촌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이 신황교회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올해가 1907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 1백주년을 맞이한 해이기 때문이다. 1905년에 설립, 지난 2005년에 교회 창립 1백주년을 지낸 순천노회 신황교회(최수남목사 시무)는 교회 설립 역사 자료를 찾지 못하고 있다가 한국교회 최초의 사기로 인정을 받고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 사기(상)(1928년 신문로교회 발행, 조선기독교창문사 인쇄)'에서 역사 근거 자료를 찾았기에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본교단 총회 역사위원회(위원장:김태복)가 검증한 결과에 대해 지난 4월 3일 위원회가 순천노회에 보내 온 자료에 따르면 신황교회는 '신황리교회'라는 이름으로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1907년에 합심하여 전도했으며, 이 결과 6, 7백명의 교인이 예배했다. 또 이들은 합심해서 연보한 결과 8간짜리 교회를 건축하기도 했다. 또 이 사료에 '선시(先是)'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듯이 이미 1907년 이전부터 예배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순천노회사(1992년 순천노회 발행, 순천문화인쇄사 인쇄)에 기록된 대로 신황교회는 1905년 11월에 교회가 설립되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교회 전통적으로는 1905년 11월 3일을 교회 설립일로 정해 지켜 왔다.

또 사기에 따르면 1907년 이전에 한태원(민비를 시해하고 달아나던 일본 군(낭인)을 추격하여 인천 앞 바다까지 가서 살해한 인물)이 광주를 오가며 매서인 조상학과 선교사 오기원으로부터 복음을 받아 자신의 구황리 서재에서 박희원(증경총회장 고 박정식목사 아버지) 서병준(전순천노회장 고 서현식목사 조부) 허준규 등 9인이 전도를 받았다. 이들을 시작으로 합심 전도한 결과 1907년의 기적을 이루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광주초기교회사와 광주제일교회1백년사 등에 따르면 광주에서의 첫 예배가 1904년 성탄절에 배유지 선교사의 임시주택에서 열렸던 것으로 알려져 광주에서 복음을 받아 예배하기 시작한 교회는 광주 양림에서 가진 이 교회 역사보다 앞설 수는 없으며, 사기에 기록된 대로 신황교회가 광주에서 복음을 전래받은 것이 확인 됨에 따라 이 지역에 최초의 교회는 신황교회라는 것이 역사가들의 설명이다.

한편 신황교회의 역사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순천노회사에 1910년에 신황교회가 교육시설인 소학교를 설립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나 이번에 사기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1907년 광양군 신황리교회에서 소학교를 설립하여 신자의 자녀를 교육했다'는 내용이 발견하게 됐다. 따라서 신황교회는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던 1907년에 양적인 부흥 뿐만 아니라 교육을 통한 민족의 지도자를 교육하는 역할까지 감당했을 확인하게 된다.

이번 역사 확인과 관련 담임 최수남목사는 "역사적인 사실을 확인하면서 지역의 최초 교회로서 감당해야 할 과제에 대한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며, "과거의 역사를 밑거름으로 역사적인 책임을 지고 농촌지역 교회의 모델을 만들어 갈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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