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창립 1백주년 맞는 경동노회 청령교회

교회 창립 1백주년 맞는 경동노회 청령교회

[ 우리교회 ] 비전 담아 새로운 백년 역사 열어간다

김성진 기자 ksj@kidokongbo.com
2007년 03월 21일(수) 00:00
도시 교회들이 많아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오늘날까지 도시교회 교인들의 못자리 역할을 감당했던 농촌 교회들이 있었다. 그동안 정성껏 교인들을 양육해 도시 교회로 떠나보내야 했던 농촌 교회는 이제 그들을 양육했던 노인들만 남아 고향을 떠난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처럼 지난 1백여 년간 도시 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감당하다가 이제 다시 교인들이 다시 고향을 찾도록 전원 교회를 꿈꾸는 교회가 있다. 올해 교회 창립 1백주년을 맞아 지난 한 세기를 마감하고 새로운 한 세기를 열어가고 있는 경동노회 청령교회(노병용목사 시무).

한 세기를 보내고 새로운 한 세기를 열어가는 뜻 깊은 전환점에 서 있는 청령교회는 지난 1907년 평양에서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의미 있는 해에 지역복음화의 기치를 높이 들고 첫 발을 내디뎠다. 당시 청령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교회를 걸어 다니며 신앙생활을 하던 2명의 신앙 선배들이 마을에 초가집 한 채를 구입한 후, 예배를 드리면서 교회가 시작됐다.

4년이 지난 1911년 예배당을 신축한 청령교회는 41년 두 명의 장로 장립과 57년 목회자를 청빙하면서 처음으로 당회를 구성하게 돼 지역에서 교회의 위상을 떨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 시대와 한국전쟁으로 피난을 다니는 어려운 시기를 겪으면서도 당시의 당회록이 지금까지 남아 교회의 산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감당하고 있다.

58년에는 교회 건축을 시작했지만 여러 가지 여건상 6년만인 64년에 헌당식을 갖는 기쁨을 맞보기도 했다. 당시에는 교인들이 직접 나서 소달구지를 이용해 교회를 건축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물론 지난 1백여 년의 교회 역사 가운데 기쁘고 감격스런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20여 년 전, 윤상곤목사가 부임해 목회 사역을 감당하던 때였다. 당시, 여름에 심한 태풍이 불고 수해가 나서 지역을 폐허로 만든 일이 있었다. 윤 목사는 새벽에 교인들의 가정이 염려돼 심방을 가던 중에 그만 교량에서 실족사한 것.

한 번은 한 장로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면서 자신이 살던 집을 교회에 헌납한 일이 있었다. 당시 교회로서는 교회 바로 옆에 목회자의 사택을 마련하는 일이 시급해 교인들이 함께 기도하고 있던 중이었다. 그러던 중에 한 장로가 집을 헌납하면서 다른 장로가 그 집에 가서 살고 교회 곁에 있던 장로의 집은 교회 사택으로 내놓으면서 목회자의 사택 문제는 쉽게 해결됐다.

올해 교회 창립 1백주년을 맞는 청령교회는 농촌지역에 자리한 작은 교회이지만 교회가 안고 있는 비전만큼은 도시의 어느 대형 교회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 5년 전부터 김신일장로를 중심으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1백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해 온 교회는 지난 10일 감격적인 1백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이날 1백주년 기념비 제막식과 함께 11일 주일에는 황수관박사를 초청, 교인들과 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예수건강 신바람 전도 집회를 갖기도 했다.

교회 창립 2세기의 첫 발을 내디딘 청령교회는 더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오고 싶은 교회, 있고 싶은 교회, 다시 오고 싶은 교회를 만들어 가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이뤄내기 위해 노병용목사는 두 가지의 목회 비전을 소개했다.

먼저 청령교회는 전도대상자가 청령마을 주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주민들의 경조사를 비롯해 마을 노인회와 청년회의 일에 교회와 성도들이 적극 참여하고 있다. 목회자가 일일이 마을 경조사에 참석해 기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눈다. 혹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주민이 병원에 입원하기라도 하면 그는 직접 병원으로 찾아간다. 여기에 1년에 몇 차례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일에도 적극 힘을 쏟고 있다. 다음으로 고향을 떠났지만 가까이 있는 출향 교우들이나 자녀들을 고향 교회로 다시 오게 만들 수 있도록 편안하고 쉴 수 있고 정을 나눌 수 있는 교회로 만들어야겠다는 계획이다.

전원 교회처럼 출향 교인들이 주말에 가족들과 함께 교회를 직접 방문하는 운동을 전개, 농촌 교회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기 위한 교회의 역할을 모색하는 일에 오늘도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1백주년 기념 행사>
교회 창립 1백주년을 맞은 청령교회는 지난 10일 노회와 지역 인사, 출향 교인 등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 감사예배를 드렸다. 노병용목사의 사회로 드려진 이날 감사예배는 증경총회장 김태범목사(삼덕교회 시무)의 '회고와 전망' 제하의 설교와 경동노회장 김종석목사(동천제일교회 시무)의 축사, 감사패 전달, 헌물전달식, 축가, 전노회장 손요나목사의 축도 등의 순으로 예배를 드린데 이어 창립 1백주년 기념비 제막식을 가졌다.

특히 5년 전부터 1백주년 기념행사를 준비해 온 청령교회는 이날 '청령교회 1백년사'를 발간한데 이어 지난 11일에는 황수관교수(연세대)를 강사로 초청, 교인들과 지역주민들을 대상으로 예수건강 신바람 전도 집회를 갖기도 했다. 또한 오는 5월 경에는 마을 잔치를 열어 지역주민들과 함께 1백년의 역사를 축하하는 잔치를 가질 예정이다.

한편 이번 1백주년 행사에는 1백여 명의 출향 교우들이 참석해 4천만 원을 헌금, 교회차량과 오르간을 선물하기도 했다.


<담임 노병용목사의 '자녀 사랑' 이야기 designtimesp=21885>
노병용목사가 처음 청령교회에 부임할 당시, 한 가지 고민에 빠진 일이 있다. 4년 동안 함께 생활하며 애지중지 길렀던 2명의 자녀를 떠나보내야 하는 위기에 처하게 된 것. 그러나 노 목사의 아름다운 뜻이 전해지면서 교인들은 그를 더욱 신뢰하는 계기가 된 일이 있다.

노 목사는 시설에 버려진 2명의 아이를 위탁받아 큰 아이는 4년간, 작은 아이는 2년간 키워오고 있었다. 큰 아이는 20개월 됐을 때 데려와 키웠고 작은 아이는 12개월 됐을 때 데려와 키웠던 것.

노 목사가 시설에 버려진 아이를 위탁 양육하게 된 데는 친 아들 때문이었다. 대구지하철 방화사건이 일어났을 때, 큰 아들의 친구 2명이 사망했고 그 사고를 계기로 가족들이 버려진 아이를 위탁 양육하기로 마음을 모으게 된 것.

그러나 노 목사가 청령교회에 부임하면서 두 아이는 오히려 걸림돌이 됐다. 괜히 교회에 알려지면 오해를 받을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개월이 지난 후, 젊은 집사들이 노 목사의 아름다운 뜻을 알고 당회에 건의해 두 아이를 계속 키우게 됐다.

큰 아이는 친부모가 요청하면 언제든지 돌려보내줘야 한다. 둘째 아이는 초등학교 입학 때까지만 양육할 수 있다. 처음 두 아이를 데려올 때는 예수를 믿게 하고 사랑을 나눠주겠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지금은 오히려 두 두 아이를 통해 가정의 기쁨을 느낄 수 있어 고맙게 생각한다. 낳은 정도 소중하지만 기른 정도 낳은 정만큼 소중하다고 말하는 그는 목회자들이 버려지는 아이들을 돌보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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